간편한 라면 한 끼, 해외에선 엄숙·진지한 의식이 되다

2025-04-30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한국과 미국 젊은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다.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나이 지긋한 손님이다. 최대 커피 소비국인 미국과 커피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겨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성인 70% 이상이 하루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대표적인 기호식품이자 현대인의 생필품인 커피는 소비자 성향과 생활양식을 가늠하게 해주는 상징적 상품이고, 커피 소비 트렌드는 시장과 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다양한 토핑에 먹는 방식도 의미

‘무엇’보다 ‘어떻게’에 집중하면

일상 속 루틴도 가치 있게 변화

커피 트렌드로 읽는 사회 변화

최근에는 인스턴트 커피가 붐이다. 2024년 미국의 인스턴트 커피 판매량은 전년 대비 31% 증가했고, 향후 3년간 커피 시장에서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분야로 꼽힌다. 특히 2030 세대의 인스턴트 커피 지출액은 지난 2년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고물가 시대에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노바이(no-buy) 트렌드가 확산하는 가운데 커피를 포기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가성비를 중시한 탓이 크다. 뉴욕에서 스타벅스 드립커피가 3.45달러인데, 집에서는 같은 양의 드립커피를 36센트에 마실 수 있다. 한국에서도 내림세를 보이던 믹스커피 소비가 2023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섰다. 메가MGC, 빽다방 등 저가 카페도 인기를 끌어 2024년 1000개 이상 증가했다.

시장의 변화에 기업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네슬레는 젊은 층의 취향에 맞춰 찬물에 잘 녹는 커피를 선보였고. 커피머신 브랜드 큐리그(Keurig)는 아이스 커피 전용 제품을 출시했다. 커피에 섞어 먹는 크리머(creamer) 판매도 확대됐다. 2024년 미국 크리머 시장은 50억 달러 규모로 커졌고, 냉장 크리머 매출은 2년 전보다 14% 증가했다. 인스턴트 커피 소비자의 85%가 크리머 추가를 선호한다고 답해 성장세는 이어질 전망이다. 헤이즐넛, 프렌치바닐라 정도였던 종류도 수십 가지로 다양해졌다. 네슬레는 크리머 브랜드 커피메이트(Coffee mate)의 슈퍼볼 광고를 내보냈고 대규모 생산공장을 신설 중이다.

프리미엄 인스턴트 커피의 진화

인스턴트 커피의 진화도 다채롭다. 스타벅스는 스타벅스앳홈 라인을 통해 비아(VIA), 카페 모먼트(Cafe Moments) 등 가루 커피를 다양한 맛과 향 제품으로 판매한다. 고급 원두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블루보틀도 에스프레소, 블렌드 등 여러 형태의 인스턴트 커피를 출시했다. 프리미엄 인스턴트 커피는 일반 커피보다 5~10배 비싸지만, 감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 좋아하는 브랜드 커피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어필한다. 건강에 민감한 젊은 층의 특성을 반영해 스테비아, 알룰로스 등 천연 감미료를 사용한 크리머와 커피믹스도 잇달아 등장했다.

홈 카페 문화도 빠르게 확산 중이다. 커피를 비롯해 첨가물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춰 직접 커피를 제조하는 경험 가치가 커졌다. 커피 제조업체들은 레시피 개발과 공유에 적극적이다. 네스카페는 블루베리 아이스라테, 캐러멜 프라페 등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인스턴트 커피 활용법을 소개한다. 동서식품은 커피 문화공간 맥심플랜트에서 수프림골드 크림라테 등 믹스커피를 이용한 메뉴를 판매하고 제조법을 알려준다. 커피 애호가들은 새로운 커피 만들기를 시도하고 직접 개발한 레시피를 공유한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마이클 노턴(Michael Norton) 교수는 최근 출간한 책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에서 같은 커피도 단지 잠을 깨기 위해 마시기보다 하루를 시작하며 한 모금씩 음미할 때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어떻게’에 집중하면 습관적인 루틴(rutine)이 의미가 부여된 리추얼(ritual)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싸고 간편해서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도 취향에 맞춰 재료를 조합하며 만들고 맛보는 일련의 절차가 일상 속 의례로 자리 잡으면 매일의 여정에서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준다.

소비생활에서 루틴과 리추얼의 차이는 크다. 일용품을 구매할 때 특별한 불만이 없으면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은데, 이러한 반복 구매는 충성 행동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크다. 경쟁자의 작은 유혹에도 쉽게 무너지는 가짜(psuedo) 충성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데믹을 경험하며 일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소비자들은 이제 일용품 소비에서도 자신의 방식을 정의하고 실천하기를 즐긴다. 정체성과 의미를 중시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습관적인 반복 구매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대신 평범한 제품도 리추얼의 일부가 되면 일상의 특별한 파트너로 격상된다.

스텔라 아르투아와 딥티크 리추얼

벨기에 맥주 브랜드 스텔라 아르투아는 화씨 36~38도(섭씨 2.2~3.3도) 맥주를 깨끗한 잔에 최적의 각도로 기울여 따르고 거품을 거둬내는 등의 9단계 리추얼로 유명하다. 고급 향수 브랜드 딥티크(Diptyque)는 ‘캔들 리추얼’을 통해 양초의 향과 어울리는 성냥으로 불을 붙여 향기를 음미한 후 스너퍼(snuffer)로 불을 끄고 트리머(trimmer)로 심지를 다듬는 절차를 알려준다. K푸드의 부상도 한국의 음식 문화가 흥미로운 리추얼로 여겨진 덕이 크다. 우리에겐 간편한 한 끼가 해외 소비자에겐 진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치러진다. 소셜미디어에는 버터와 치즈, 다양한 토핑으로 라면을 끓이는 과정부터 후루룩 소리 내며 먹는 방식까지 알려주는 동영상이 많다.

입학과 졸업, 결혼 등 큰 의례 행사를 거치며 일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소소한 리추얼이 하루하루 리듬을 만든다. 특히 자기애(self love)가 큰 젊은이들은 식사와 명상, 정리 정돈 등 일상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만의 방식에 몰입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가성비로만 경쟁하던 평범한 제품도 고객의 삶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어 몰입의 대상이 되면 간편식이 코스요리로 변하듯 가치가 더욱 커진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