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법, 공영방송 개혁인가 장악인가

2025-08-13

언론학 교과서에 나오는 공영방송의 순기능은 천금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상업성에 물들지 않은 고품질 콘텐트를 제공할 수 있다. 고유문화를 콘텐트에 녹여내 글로벌 문화 공세에 맞서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핵심 공론장이다. 요컨대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데 요긴하다는 것이다. (신삼수·봉미선, 『세계 공영방송과 디지털 혁신』)

KBS 이사 정치권 지분 줄었지만

여전히 친여 성향 이사회 가능성

여당 방송법 강행, 나쁜 선례 될 것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의 공영방송은 거꾸로 간다. 적어도 정권 교체기마다 공영방송 통제권을 빼앗겠다고, 뺏기지 않겠다고 드잡이하는 여·야 정치권을 보면 그렇다. 전 대통령 부인 구속에 따른 초유의 부부 구속, 안보 환경 전환기의 한·미 정상 회담, 험난한 관세 파고…. 하나같이 메가톤급인 뉴스들의 폭주에 빠르게 묻혔지만 지난 5일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진통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방송법은 다시 한번 공론장을 찢어 놓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색깔 선명한 중앙 일간지들의 시각이 판이했다. ‘공영방송 독립 기틀 마련’(경향신문)이라는 해석 반대편에 ‘정권 바뀌어도 친(親)민주 방송 못 막아’(조선일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번 방송법 개정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당사자인 KBS 노조원들의 반응은 방송국 밖 공론장 분열의 축소판 같다. KBS에는 크게 3개의 노조가 있다. 이들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보수적인 KBS노동조합(1노조)은 ‘공영방송 해체로 가는 방송법 개정안 강력히 규탄’, 진보 성향의 언론노동조합 KBS본부(2노조)는 ‘역사적 방송법 개정’, 선배 세대의 진영과 정치적 이해에서 벗어나겠다며 2023년 출범한 ‘같이 노조’(일명 MZ 노조)는 ‘방송법 개정, 변화의 문은 열었지만’이라는 반응을 5일 일제히 내놨다.

한 고참 직원의 페이스북 글은 이른바 ‘정치적 후견주의’에 의해 공영방송 KBS가 얼마나 안으로부터 곪아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정권 성격에 따라 KBS에는 진보 참칭 무리, 보수 참칭 무리가 번갈아 가며 언론 사명(使命)이나 회사 발전보다 주요 보직과 자원 독식에 안달이었는데, 개정 방송법의 취지는 좋지만 벌써부터 회사 안팎에는 진보참칭 노조꾼, 방송쟁이들 사이에 차기 사장·본부장·국장은 누구누구라는 식의 괴담이 돈다고 했다.

‘방송인들의 타락’을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개정 방송법에 대한 ‘같이 노조’와 고참 직원의 시각에 동의한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과 그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대목 말이다. 평가해줄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여·야 정치권이 7명·4명씩 KBS 이사를 추천하던 종전 관행에서(100%), 전체 이사 수를 기존 11명에서 15명으로 늘리면서 정치권 추천 몫을 6명(여 4, 야 2, 전체의 40%)으로 줄인 만큼 정치권의 직접 지분은 줄어든 것 아닌가.

하지만 조금만 귀동냥하면 개정 방송법이 정치권 입김에서 과연 자유로운 ‘공영방송 독립법’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앞서 언급한 정치권 몫 6명을 빼면, 시청자위원회가 2명, 임직원이 3명, 방송 미디어 관련 학회가 2명, 변호사 단체가 2명씩 각각 추천하게 돼 있는데, 시청자위원회는 편성위원회에서 추천·구성하고 편성위원회는 방송사업자가 추천하는 5명과 취재·보도 부문 등의 종사자 대표가 추천하는 5명으로 구성하게 돼 있다. 이 대목이 ‘1차 노림수’라고 보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편성위원회의 종사자 대표는 결국 노조일 텐데, 2노조가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예상은 극단 투쟁에 염증을 느껴 떨어져 나온 ‘같이 노조’ 조합원들이 새 방송법이 시행되는 국면에서 결국 2노조와 뜻을 같이할 수 있다는 추정을 근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임직원 추천 몫, 시청자위원회 추천 몫을 친여 성향 인사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익히 지적된 대로, 방송법의 세부를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정하게 돼 있는데 현재 방통위는 이진숙 위원장 한 명뿐이어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점이다. 비위 혐의로 이 위원장을 해임하려 한다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대상이 될 수 있는 데다, 방통위 자체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구(가령 공영방송위원회)를 만들어 KBS 이사회 구조를 바꾸려 한다면 그런 시도 또한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번 방송법 개정이 긴 싸움의 시작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여당의 방송법 일방 처리는 무리수였다. 이제는 정권 바뀌면 법 바꿔서 공영방송을 요리해도 된다는 선례까지 만들어졌다. 공영방송을 개혁하려는 건가, 장악하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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