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치과의사 선생님들의 온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아즈미 암루딘 씨(41)가 눈시울을 훔쳤다. 막내 아들 ‘치호’(3)의 치과 치료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치협과 치호네 가족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여수에서 시작됐다. 당시 치호네 가족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이 해양경찰교육원에 체류 중이었는데, 이때 치협이 진료 지원차 이들을 찾았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는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한국 정부가 펼친 사업을 도운 현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 2021년 복권한 탈레반의 위협을 피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은 같은 동포라도 외국에 협력한 자라면 그 가족까지 숙청과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현지인 400여 명을 탈출시켜 국내 수용했고, 그 가운데 치호네 가족도 있었다.
특히 치협과 치호네 가족의 인연은 더욱 특별하다. 치협 방문 도중, 한 특별기여자 가정에서 새 생명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는데, 그게 바로 치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호는 1.6㎏의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치료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삶의 기반을 모두 잃은 치호네 가족으로서는 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이 소식을 접한 치협은 함께 봉사에 참여한 롯데웰푸드, 아프간 특별기여자 정부합동지원단과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또 그 자리에서 1000만 원의 정성을 모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키로 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로운 생명을 ‘치호’라고 부르기로 했다. ‘치과의사’와 태어난 해 십이간지인 ‘호랑이’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당시 치협과 치호네 가족의 사연은 전국 각지로 알려지며, 우리 사회에 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일깨우는 미담이 됐다.
# 몸·마음 고된 한국살이지만 후회 없어
그로부터 3년여 지난 올해, 본지는 다시금 치호네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생장을 상징하는 푸른 뱀의 해를 맞이해, 치과계가 숨을 불어넣은 생명을 되돌아보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한 달여 수소문 끝에, 대한적십자사와 법무부의 도움으로 치호네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느덧 세 살이 된 치호는 수줍은 표정 속에 여느 또래 아이들과 같은 개구쟁이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낯가림도 잠시, 금세 웃고 뛰놀고 싶어 했다. 그런데 미소 짓는 치호의 구강이 눈에 띄었다. 세 살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아우식과 마모가 심각해 보였다.
이에 기자가 치호의 구강건강 상태를 묻자, 아버지인 암루딘 씨는 그제야 고된 한국살이를 고백했다. 들어보니 그는 최근 1년간 실직 상태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정부와 일할 당시 그는 건축·시설 전기 기술 전문 교육자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가 보유하고 있던 학위나 자격이 인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가 알선한 공장의 생산직 근로자로 일하게 됐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어 처음 겪는 육체노동은 1년 만에 건강을 해쳤다. 곧 허리디스크 등 문제가 터졌고, 직장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암루딘 씨는 “원래부터 건강한 체질이 아니어서 곧잘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육체노동을 시작했다. 가족들을 위해 견뎌봤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가장인 암루딘 씨가 직장을 잃자, 치호를 포함한 가족들 생활 환경도 악화했다. 다행히 현재 정부가 최소한의 주거·생계를 지원하고 있지만, 여섯이나 되는 가족의 생활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특히 식생활 타격이 컸다.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 율법이 허용하는 식단을 유지하기란 애초부터 쉽지 않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며 불균형이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게다가 설탕을 좋아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생활 습관까지 더해졌다. 이에 가족들의 구강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특히 어린 치호는 양치질 등 일상적 구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경제적 부담으로 치과 문은 제대로 두드려보지도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암루딘 씨는 “고향에서는 경제적 고민을 하지 않을 만큼 윤택했다. 한국 정부가 구출해 주지 않았더라면 가족 모두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기에, 한국행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 고된 것은 사실”이라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 치과계와 소중한 인연 삶의 희망 얻어
치호네 가족의 이 같은 상황이 알려지자, 치과계에서는 도움의 손길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 모였다. 무엇보다 치협은 ‘치과의사’의 이름을 받고 태어난 ‘치호’의 구강건강만큼은 치료할 수 있도록 돕고자 나섰다.
다행히 정현우·이정옥 원장(e-편한치과의원)이 치호를 직접 치료해 보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검진 결과, 치호의 구강건강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전치부는 대부분 썩어 있었고, 개중에는 거의 뿌리만 남아 부러질 위험에 처한 치아도 있었다. 이에 두 원장은 치호의 썩은 치아를 모두 수복하고, 그 밖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마쳤다.
정현우 원장은 “평소 소아 진료를 하지 않아 다소 어려움을 느꼈지만,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치료했다. 새해 좋은 일에 동참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 같은 치과계의 도움에 치호네 가족은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특히 가장인 암루딘 씨는 각박한 한국살이지만, 희망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올해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이수하고, 대학을 통해 학위와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말했다. 암루딘 씨는 “치과의사 선생님들께서 또다시 도움을 줘, 너무 감사하다”며 “이제 우리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치과의사 선생님들이 건넨 온기를 품고, 제2의 고향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