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첫 미국 방문 사흘째 되던 날(2003년 5월 13일). 뉴욕 숙소에서 잠시 휴식 중이던 노무현은 대뜸 집무용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서울의 청와대 교환원에게 곧바로 연결됐다.
새벽 시간의 상황실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경호실 종합상황실로 연결했다. 노무현은 파업 상황이 어떤지를 물었으나 소관도 아닌 경호실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리 없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의 청와대는 이처럼 엉성했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고, 현장에서 전화 통화를 듣고 있던 의전비서관 서갑원은 안절부절했다.
“내일 당장 미국 경제인들을 만나 국내 투자 유치를 설득해야 하는데, 등 뒤에서 저 난리가 벌어지고 있으니 무슨 낯으로 투자하라고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구먼.”
혼잣말로 하는 대통령의 푸념이었다.
방미 중 뉴욕 호텔서 청와대로 긴급 전화
미국에서까지 갑자기 청와대로 전화를 걸어 파업 상황을 직접 챙긴 것은 즉흥적인 게 아니었다. 사실 출국 당일(5월 11일)까지도 노무현의 머릿속에는 온통 화물연대 파업 문제였다. 일요일이던 이날 오전 9시에 긴급 국무회의까지 소집해 파업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파업사태를 대하는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카드대란이야 김대중 정권이 저질러 놓은 일의 뒤치다꺼리였다고 치고, 화물연대 파업은 또 무엇인가. 사실 일반에게도 화물연대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자기 소유의 트럭을 가지고 운송업을 하는 일종의 자영업자들이 조직을 만들어 집단 파업을 한다고?
그 경위야 어찌됐든,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남짓의 시점에 화물연대 파업이 시작됐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인 포항을 일시에 마비상태로 몰아 넣었다. 부산에 이어 수도권까지, 파업은 요원에 불길처럼 번지며 전국적으로 2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사태로 발전했다. 운송이 막히면, 다시 말해 물류가 막히면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지를 처음 경험해야 했다. 과거 화물 차주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지역 단위에서 소규모 파업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 같은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 사태는 없었다. 그랬던 것이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1년 전에 조직화하면서 ‘화물연대’를 결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