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 찍어’ 형제복지원 국가폭력 피해자 꺾어야겠다는 대한민국 정부

2024-11-24

‘놀다가 던진 슬리퍼에 지나가던 경찰이 맞았다’거나 ‘기차역에서 외할머니가 표를 예매하는 사이 혼자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수용시설에 강제로 끌려가 폭력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1975~87년 부산 북구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이다.

40~50년이 흐른 지금 법원은 피해자들이 “거처가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납치”(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됐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성착취·강제노역·구타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사실도 인정됐다.

국가는 배상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시효가 지났다’거나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 집행을 특정해야 한다’며 배상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들의 속은 타들어 간다. 지난 17일에는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한 피해자 김의수씨(52)는 ‘국가가 상고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상고 기한이 5일 남은 24일까지도 2심 재판 결과 수용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국가가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식으로 배상 책임 회피를 위한 소송전을 거듭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강제 수용’ ‘감독 소홀’···법원이 일관되게 인정한 국가 책임

경향신문은 서울중앙지법, 부산지법의 8개 재판부가 형제복지원 피해자 111명이 3~19명씩 나뉘어 낸 국가손해배상 사건에 대해 지난 1~10월 내린 1심 판결문 10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법원은 일관되게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재판부는 일관되게 형제복지원 강제 수용의 근거였던 훈령이 위법이자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는 국가가 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묵인해서 피해자들의 “생명·신체 등에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 상태가 발생했다”고 봤다. 훈령에는 수용시설을 위탁 운영하더라도 업무 감독 체계를 확립하고, 경찰이 주 1회 순찰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형제복지원이 있던 부산 북구는 1986년 세 차례 지도 감독을 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만연한 가혹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형제복지원이 “순찰 대상 지역이 아니었다”는 당시 경찰관 진술도 있다.

당시 국가는 부랑인 단속을 묵인·장려했다. 부산 경찰은 경찰관 근무 평점을 할 때 부랑인 인계 가산점을 줬다. 형제복지원 선도반이 잡아온 부랑인을 경찰이 단속한 것처럼 서류를 허위로 작성한 일, 경찰이 형제복지원에 부랑인을 인계하고 돈을 받은 일도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제27민사부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갖고,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며 “빈곤·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부랑인으로 구분해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서 격리하고, 형제복지원을 사회복지기관으로 인가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단속한 부랑인의 수용을 위탁하고는, 형제복지원 등이 폭력적 방법으로 부랑인을 감금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강제 노역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묵인·비호하였다”고 지적했다.

어린 나이에 수용된 피해자들은 강제 노역, 폭행에 시달렸다. 성폭력도 비일비재했다. 부실한 의료환경에도 노출됐다. 피해자들의 몸에는 좌안 적출·척추협착·우울증·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청각 일부 상실 등 병이 남았다. 감금된 동안 유년·청소년 피해자들의 교육받을 권리도 침해됐다. 서울중앙지법 제14민사부는 “미성년자로서 학령기에 있던 원고들 대부분이 강제노역, 폭행 등에 시달리며 장기간 수용되어 있다가 퇴소한 경우 정상적인 정서적 발달과정을 겪지 못했다”며 “성인이 된 후 발휘할 수 있었던 잠재적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오게 된 큰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의 ‘지연된 정의’ 지적에도 국가는 불복

법원은 배상액을 정할 때 피해자들이 오랜 시간 고통받은 점도 고려했다. 부산지법 제11민사부는 “불법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약 35년 이상 이르는 오랜 기간 배상이 지연됐다”고 짚었다.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도 “피해자들은 본인들이 범죄 행위의 피해자라고 인정받지 못한 채 사회 안녕을 저해하는 ‘부랑인’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아야 했고, 손해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사실상 상실시켜 피해자들이 장기간 고통받게 된 사정도 참작돼야 한다”고 봤다.

국가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승소한 2심 결과에 반발해 대법원에 상고한다면 피해 회복은 그만큼 더 미뤄지게 된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피해자들이 소송을 시작한 궁극적 목표는 대한민국 법원으로부터 국가 폭력을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국가의 거듭된 항소는 되레 피해자들로 하여금 ‘돈을 강탈한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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