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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이 확정된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터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내란 사태로 한국 경제계는 어느 때보다 짙은 불확실성에 갇혔다. 국가 컨트롤 타워 부재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국내 기업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는 역할을 했다. 급기야 '대행의 대행' 형국에 빠져 컨트롤 타워의 부재는 더 크게 와닿았다.
주요 기업들을 출입하면서 만난 여러 취재원 사이에서도 그 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교적인 힘에 기대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정국은 기업들에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누군가는 기업들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수출과 무역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며 내세운 우리 정부의 치적은 오히려 트럼프의 눈엣가시가 돼 관세 폭탄으로 되돌아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 소위 '트럼프 리스크'에 부딪힌 우리 기업들이 목소리를 낸다 한들 들어줄 이가 없으니 '외로운 싸움' 중이라는 취재원의 성토에 공감이 간다.
이웃나라 일본은 발빠르게 나서 미·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LNG 에너지 수입 확대를 약속하는 등 리스크 대응을 마무리해 가는 모습이다. 인도는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맞아 관세 역(逆)인하를 결정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대통령도, 총리도 자리를 비운 이 시점에 살길 찾아가는 옆나라 이웃나라를 보고 있으면, 우리 기업들의 허탈함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재계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내온 총수들에 시선이 쏠린다.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치며 국가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달 초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등 세계 인공지능(AI) 거물들과 잇따라 만나 AI 동맹을 논했다. 세계 패권을 쥐는 데 있어 AI의 중요성이 나날히 증가하고 있는 만큼 그날의 회동은 무게감이 남달랐다. 정부도 해내지 못할 일이다.
물론 개별 기업 입장에서 필요에 의해 진행한 회담이었겠지만, 모든 나라가 AI를 외칠 때 우린 '대왕고래'만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 두 총수가 진행한 당시 회동은 의미가 다르다.
최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역할까지 맡으며 대미 경제사절단과 트럼프 2기 행정부 아웃리치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컨트롤타워 부재 속 직접 외교·통상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내실 다지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재용 회장은 '이 상무' 시절 만든 공부모임인 '미래기술연구회'를 새롭게 출범시켰다. 국내 유명 석학과 최고경영진이 머리를 맞대고 삼성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리다. 임원 2000명을 대상으로 한 교육 세미나도 준비하고 있다. 재계에선 사법리스크에서 보다 자유로워진 이 회장의 대외활동이 점차 확대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SK그룹은 계열사 CEO들을 소집해 글로벌 경영환경에 맞는 대응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회의를 주재한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해관계자들은 SK에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며 "리더들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이들의 역할이 재계 맏형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한 취재원은 이런 총수들의 모습을 보며 "재계 대통령이란 호칭을 붙여줘야 하는거 아니냐"며 "재계 맏형들이 기업인들의 대통령이 된거 같다"고 말한다. 또다른 취재원은 "다른 나라 기업들은 정부 힘을 빌려 위기에 맞서는데 우리는 기업들이 나라를 지탱하는 거 같다"고 웃픈 소리를 전한다.
웃프지만, 모두가 그들만 쳐다보는 게 현실인 것 같다. 재계 '맏형'으로서, 아니 기업인들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해내야 하는 그들의 부담이 하루빨리 해소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