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물로 가득 찬 거대한 웅덩이가 캔버스 중앙을 차지한다. 깊고 어두워 불길한 기운마저 풍기는 웅덩이 주변에는 부식된 목재와 이끼 낀 얼룩만 가득하다. 쇠락한 도시의 풍경인가 싶지만 가림막 너머의 정경은 사뭇 다르다. 빼곡히 들어선 주거용 건물들이 이런 흉물은 보이지 않는 양 무심하게 서 있다. 실제 작가도 이 장면을 연일 관광객이 오가는 제주 함덕의 한 호텔 창밖에서 포착했다고 한다. 일상과 맞닿은 폐허. 안경수 작가는 이 같은 ‘현재 진행형의 폐허’를 담담하게 그려내며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풍경화, 그중에서도 폐허의 풍경을 그리는 안경수 작가의 개인전 ‘겹겹’이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폐허란 흔히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실된 흔적을 의미하지만 안 작가가 묘사하는 폐허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과거로 완결된 폐허가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있는 폐허를 그린다. 태풍과 지진이 지나간 뒤에 남은 흔적이나 도심 재개발로 파괴된 풍경, 화려한 관광지의 이면이나 방치된 공터 등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바깥쪽의 풍경’을 폐허로 간주하는 것이다. 작가는 “과거 서울 은평뉴타운 개발 현장에서 연립주택이 반쯤 철거된 모습을 봤는데 누군가 생활하던 방이 그대로 노출된 모습에 시각적 충격을 받았다. 한때 소중했던 사적 공간이 폐허가 되는 감각을 느끼며 그때부터 이런 일상 속의 폐허 조각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풍경은 한 겹이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작가는 직접 장소를 방문하거나 과거의 사진 및 영상에 대한 광범위한 리서치를 통해 폐허의 이미지를 길어 올린 뒤 캔버스 위로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폐허의 풍경들이 말끔한 현재의 풍경 위로 가시화하는 순간 관람객은 내일의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된다.
일례로 ‘비치’의 경우 쾌청한 하늘 아래 야자수가 즐비한 장면은 해변의 휴양지를 그린 것이 분명한데 그 앞에는 부서진 목재 조각과 뒤틀린 야자수 잎, 무너진 구조물이 가득하다. 작가는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파괴된 휴양지 리조트의 폐허를 20년이 지난 현재의 풍경 위에 겹쳐 놓으면서 일상과 파괴가 공존하는 기묘한 정경을 완성한다. 반대로 ‘수영장’의 경우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부드럽게 흩어지는 빛으로 가득찬 평화로운 풍경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풍경을 포착한 시간과 장소가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가 있었던 1944년의 다하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고요함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작가는 “잠시 등장했다 사라져 버린 장면이라도 그 겹은 지워지지 않은 채 우리가 늘상 보고 있는 풍경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며 “현재의 풍경이란 폐허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감각을 느끼길 바라며 작업했다”고 말했다. 작가의 풍경화 총 13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내년 1월 1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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