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남자

2024-10-10

고미선 수필가

새벽에 갠지스를 다시 찾았다. 바라나시를 찾는 순례객은 ‘어머니 강’이라 불리는 갠지스에 꼭 들린다. 인도는 힌두사상인 시바신(神)으로 가득 찼다. 시바신은 파괴와 창조의 신이다. 이들은 노천 다비장에서 마감하는 삶을 윤회와 환생의 도구로 삼는다. 힌두사상에서는 물의 축제라 하여 한 달에 한 번씩 갠지스 가트에서 춤추며 행한다.

해뜨기 한 시간 전,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비스듬한 내리막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갔다. 지난밤 빽빽하던 인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항하사’ 뒤쪽 구름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은 젖은 이슬을 점차 녹이고 있다. 강 위의 다리도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강물이 출렁이며 부는 바람은 상쾌하고 깨끗하다. 말로만 들었던 갠지스강은 어머니처럼 품이 넓다.

어젯밤의 축제광경은 불꽃과 음악으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 느낌대로라면 아침이 오지 않을 듯하였으나 조용하다. 어젯밤 7명의 제사장은 일산(日傘) 아래서 의식을 치렀다. 아침이 되자 음악은 없다. 향과 횃불을 들었던 제사장 중 두 사람은 향로에 많은 양의 향을 피워 돌려가며 춤춘다. 긴 횃불을 들고 머리, 가슴, 몸, 다리 순서로 돌리고 또 돌렸다.

단 아래에서 대기하던 힌두인은 제사장의 기운을 받으려고 이마에 붉은 염료를 묻혔다. 다비장 계단의 장작 무더기도 그제야 보였다. 다비장과 축제의 연결고리가 궁금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는 수행자가 눈에 띄었다. 이른 아침에 나와서 동료들과 머물던 3시간 동안 통 위에 앉은 수행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물과 하나 되게 무상 심심 명상하다가 찰나에 깨달음을 붙잡으려고 오래도록 앉아 있을까.

힌두인 중에는 부자도 많다. 육십 세가 넘으면 가진 것 전부 집에 두고 수행자로 변신하여 집을 나온다. 그들은 새로운 몸을 받으려 묵언하며 죽을 때까지 갠지스에 묻히기를 소망한다. 무엇을 생각하며 고집멸도를 행하려는 일일까.

올라오는 길목이다. 길가에 창문 없는 상점 같은 곳이다. 불빛도 없고 여남은 명의 남성이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는 산발한 채 언제 씻었는지 먼지와 때가 덕지덕지 묻어 보였다. 지긋이 눈감고 묵언 중이다. 바람결에도 성찰을 못 했다는 말인가.

남자들은 무표정이다. 세찬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가려나. 노란 가사로 아랫도리만 감싼 사람, 머리에 하얀 터번을 두른 사람, 고수머리의 외국인 등 다양하다. 시바신(神)을 모시는 알몸 수행자도 앉았다. 검은 분탕 칠한 남자는 눈을 내리감고 방하착 하고 있으려나. 저 수행자는 이곳을 ‘유영굴’로 여겨 그림자만 남기고 떠나지는 않을 테지.

다종교를 모시는 인도에는 곳곳에 자이나교가 있다. 숲속에서 문명을 벗어나 혼자 사는 사람 같다. 부끄러움도 없고 신의 경지에 오르는 초자연적으로 생각하는 남자이다.

자이나 성직자는 축제 때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살아있는 시바상이 우상이라면 인도에서 빈부의 격차도 사라져야 할 일 아닌가. 사르나트 법당에 모셔진 시바신도 하반신에는 가려질 가사 없이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갠지스에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문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도 느리게 행동하고 있다. 강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남자들이 스멀거린다. 갠지스에 오는 사람은 생각하는 남자로 변하는 이유가 낯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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