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하고 싶은 말

2025-05-15

아빠·남편을 잃은 모녀의 휴가

미처 쏟아내지 못한 슬픔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데

마음의 빗장 풀 단 한마디만…

릴리 킹 ‘북해’(‘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에 수록,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열두 살짜리 딸 한네는 원치 않았고, 오다는 그럴 형편이 못 됐지만 친구들과 사회가 그런 시간을 꼭 가져야 한다고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아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이주간의 휴가를 위해서 이년 가까이나 돈을 모았다. 처음으로 딸과 단둘이 떠나는 휴가였고, 오다는 이 기간에 한네와 자신을 위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 모녀에게 어떤 일인가 있었던 걸까? 궁금해지는데, 여객선에 타지 않고 버티는 딸 때문에 난처해진 오다가 배의 경사로를 막으려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듯 말한다. “아이 아빠가 세상을 떠났어요.”

펜션 주인은 방을 예약하려고 통화했을 때보다 친절하고 젊은 사람이었다. 배에서 내리기 전에 말을 봤다는 한네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섬의 동쪽 끝에 말을 빌려주고 타는 법을 알려주는 여자가 있다고 알려준다. 그의 친절에도, 한 시간도 말을 대여할 돈이 없다는 것에도 오다는 벌거벗은 기분이 들고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조식은 방값에 포함돼 있어 괜찮지만 다른 식사는 식료품을 사서 방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이년 전에 죽은 남편은 생명보험도 비밀 계좌도 없이 빚만 남겨두었고 올봄에야 겨우 갚았다. 오다는 휴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쳐서 꽃무늬 천을 덧씌운 팔걸이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 얼룩처럼 아스라한 잿빛을.

한 침대에서 한네는 오다에게 등을 돌리고 잤고, 다음날이면 해변으로 산책하러 가거나 등대까지 걸어가 보거나 공공 수영장에 가보자고 하는 오다의 모든 제안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다는 자신이 그 나이대 무엇을 재밌어했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큰 슬픔을 함께 겪었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윗방에서 호주인 부부의 세 아이가 내는 쿵쿵 소리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귀중한 휴가가 하루하루 흐르고, 오다로서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네에게 승마 교습을 시켜주는 수밖에.

딸이 말을 타러 가는 오후에 오다는 지금껏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볼 수도 있었다.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걸 보러 가고 유명한 정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오다는 그저 “책과 차를 옆에 두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기만 했다.” 멀리 내다보면 한네가 말을 타고 해변을 따라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얕은 물에서 말발굽이 반짝이는 것도. “휴가로부터의 휴가.” 오다는 생각했다. 어른들은 고통과 실패를 감추고 사춘기 아이들은 “보여주면 사라질 어떤 것처럼” 행복을 감춘다고. 그렇게 한네와 오다는 북해에서 자기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좋은 소설에서는 여러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동하는데 특히나 보조 인물의 역할이 그러하며 ‘북해’에서도 그 점이 돋보인다. 육아에 지친 호주 부부가 한네에게 세 시간, 베이비시터 일을 제안했다. 배를 타고 섬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불안해하는 오다의 눈에도 한네는 능숙하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간식을 먹인다. 그러나 부부는 약속한 시각에 오지 않았다. 왜 엄마아빠가 오지 않느냐고 겁에 질려 우는, 더는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한네가 최면에 걸린 듯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네의 그 거짓말. 아마도 아빠가 죽었을 때 선생님이 한네를 불러 조심스럽게 한 말과 같을지도.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단편이 다루는 건 인물의 감정이며 그 일은 결말에서 꽃이 피듯 이루어진다. 처음 읽을 땐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한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휴가가 끝나기 이틀 전이었다. 마침내 펜션 현관으로 떠들썩하게 호주인 부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환호성을 외치면서 아이들이 뛰어나가고, 방에는 이제 한네와 오다만 남았다.

지난해 마음이 사나워져서 생략했던 카네이션을 식탁에 올려두면서 내 어머니에게도 할 말이 많다고,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고 여겨왔다. 모녀를 다룬 좋은 단편들이 그렇듯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든다. 그냥 한마디면 충분한지도 모르겠다고. “엄마.” 엄마라는 그 기도 같은 부름이면.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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