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평범해서 오히려 특별해진 ‘흰색 운동화 이야기’

2024-11-23

이것은 완벽하게 평범하고 지나치게 조용해서 오히려 조금 특별해진 흰색 운동화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나 오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면바지와 청바지를 가리지 않고 가끔은 정장 바지 비슷한 느낌으로 입고 싶은 날에도 고민 없이 신을 수 있는 흰색 운동화를. 의도와 다르게 오래 걷게 되는 날에도 발이 편해서 걱정할 일이 없고, 누가 봐도 묘하게 정중해서 ‘저런 운동화라면 면접 자리에서도 문제없겠다’ 싶은 느낌이 드는 그런 운동화를 말이다.

여러모로 완벽에 가까운 이 흰색 운동화의 정식 발매 이름은 ‘남성 코트 스니커’다. 무인양품과 리복이 같이 만들었고 무인양품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다. 사진만 보면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질 좋은 흰색 가죽 신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담백하고 본질에 충실한데 헤리티지와 이야기까지 갖추고 있는 스니커는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사야 했다. 혹시라도 품절되기 전에.

면바지·청바지·정장 바지부터 오래 걷거나 격식있는 자리…모든 곳에 어우러지는 흰색 운동화

생필품부터 자동차까지 ‘최대한 덜어내고, 조용하게’ 만들어온 무인양품의 철학 고스란히

스니커(sneaker)는 영어 단어 그대로 ‘살금살금 걷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세계 최초로 이 단어를 상품명으로 쓴 회사는 미국 브랜드 케즈(keds)였다. 케즈는 1916년에 밑창을 고무로 만든 신발을 내놓았고, 이 신발을 신으면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아서 ‘스니커’라고 불렀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었을 때 나는 소리 대신 고무 밑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케즈는 거리에서 그 ‘또각또각’ 소리를 사라지게 만든 브랜드로도 유명하다.

이 조용하고 편한 신발을 신으면 발을 혹사시키지 않으면서 오래 걸을 수 있었다. 구두를 불편해하는 사람에게도 맞춤이었지만 운동선수에게도 당연히 좋았다. 그래서 1916년에 케즈가 출시한 세계 최초의 스니커에는 ‘챔피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운동하기에도 좋고 외부 활동에도 좋고 발도 편한, 그야말로 일상의 혁신이었던 셈이다. 고무 밑창과 캔버스 천으로 만든 디자인의 고전적인 이미지와 단순함 덕에 매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오노 요코 같은 셀레브리티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코트 스니커’는 그 와중에 조금 더 ‘코트’에 잘 어울리는 스니커다. 테니스나 배드민턴 코트에 신고 들어가면 모조리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접지력과 내구성이 좋아 미끄러지지 않으면서 오래 신을 수 있는 고무 밑창 운동화다. 코트 스니커의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콘의 지위는 아무래도 리복(Reebok)에 있지 않을까? 리복이 ‘클럽 C85’라는 이름의 스니커를 출시한 건 1985년이었다. 한국에서는 LF가 라이선스와 국내 영업 권한을 확보해 이 클래식한 운동화를 다시 시장의 중심에 서게 했다. 최근에는 가수 이효리와의 캠페인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리복은 1895년에 영국에서 설립된 브랜드. 벌써 129년이나 됐다.

여기서 무인양품이 (드디어) 등장한다. 무인양품은 그 담백함과 심심함으로 세계를 제패한 브랜드다. ‘뉴요커’가 “무인양품이 노리는 건 심플함이 럭셔리보다 매력적일 수 있다는 발상”이라고 썼던 건 2015년이었다. 그즈음 ‘뉴욕타임스’는 무인양품을 두고 ‘진정제를 복용한 이케아’라고 썼다. 시작은 1980년이었다.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1.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물건일 것. 2. 생활용품은 사용하기 쉬운 것 기준으로. 3. 식품은 맛은 물론 안심할 수 있는 재료를. 4. 옷은 무엇보다 착용감 중시.

무인양품은 이것이 좋다, 반드시 사야 한다는 설득에는 좀 관심이 덜한 브랜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보다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는 데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본질에 집중해 설득력 있는 가격으로 판다. 어쩌면 정석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요즘은 시끄러워야 잘 팔린다. 혹은 잘 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장에서는 잘 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충분하다. 그런 분위기나 이미지 자체로 또 다른 소비자군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성공팔이’ 같은 것이다. 정작 이렇다 할 성공을 해낸 적은 없지만 성공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성공을 향해 가는, 불 자체를 끌 실력은 없지만 현란하게 연기만 흩날리는 듯한 느낌으로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것도 요즘 같은 SNS의 시대에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인양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확장해왔다. 129년의 헤리티지를 가진 회사와 협업해 1985년부터 아이콘이었던 스니커를 다시 만들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오히려 뺄 수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뺐다. 그렇지 않아도 단순했던 C85를 다시 표백하듯 했다. 그래서 흰색만 남았다. 브랜드는 없앴는데 태그가 있었던 자리는 남아 있다. 밑창 바닥을 들춰 봐야만 흰색 고무로 된 브랜드명, ‘Reebok’을 가까스로 만날 수 있다. 아, 뒤꿈치 부분에 천으로 고리를 만들어 달긴 했다. 신을 때의 편의를 위한 고리인데, 그 각도를 바깥쪽으로 살짝 기울여 손가락을 끼울 때 훨씬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디자인은 표백하고 편의에는 집착해 딱 하나의 디테일로 표현한 셈이다. 모조리 지워버린 후 점 하나만 찍어 놓았다. 여기서 느껴지는 건 ‘감각’ 같은 벙벙한 단어가 아니다. 대신 전율이 느껴지는 정도의 대담함. 혹은 자신감. 무인양품이 지금까지 쌓아온 그 매력적인 태도가 스니커 한 켤레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이 회사는 심지어 자동차를 만들 때도 같은 전략을 썼다. 2001년 4월, 무인양품은 닛산과 함께 자동차를 출시했다. 닛산의 ‘마치’라는 모델을 기반으로 같은 철학의 디자인으로, 역시 표백한 것 같은 자동차를 딱 1000대만 만들어 한정판으로 팔았다. 자동차는 약 3만개의 부품으로 이뤄져 있다. 제조부터 판매까지 뭐 하나도 단순치 않다. 한정판이라 제조단가도 높으니 실패하면 손실이 컸을 것이다. 눈길을 끌어도 모자라는 판에 지우고 지워 흰색 지우개 같은 차를 만들어 팔다니. 애초에 표백의 스케일이 달랐다. 그저 심플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한다는 수준의 브랜드가 아니었던 것이다. 포부와 결기가 살아 있었다. 무인양품과 닛산은 1000대 한정판을 깔끔하게 팔고 단종했다.

무지 카는 이제 살 수 없지만 코트 스니커는 언제든 살 수 있었다. 출시는 8월이었지만 단종이나 품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를 달구거나 줄을 세우는 제품도 아니었다. 몇 개의 기사만 검색될 뿐 이 집요한 브랜드는 이 예쁘고 특별한 스니커를 그저 조용히 팔고 있었다. 심지어 사기도 불편했다. 무인양품 앱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온라인에서 주문하고 싶다면 오로지 웹사이트를 통해, 애플 맥북이 아니라 윈도를 쓰는 컴퓨터로만 결제할 수 있었다. 일본 관공서에서는 아직도 플로피 디스크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누가 했었지? 도대체 이 회사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흐름에 올라타지 않는데도 어떻게 유지하고 지켜내며 심지어 확장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결국 샀다. 드디어 신었다. 새로운 기술이 적용됐다는 설명을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딱 좋은 정도의 편안함과 예쁨. 오래 신어도 발이 피곤하지 않았다.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퉁퉁 부은 발도 부드럽게 감싸줬다. 이렇게 무던하니 분명히 오래 신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마저 있었다.

이 모든 헤리티지와 이야기, 태도와 철학과 디테일, 내 발만 느낄 수 있는 이 충만함까지를 9만9900원에 살 수 있다니. 웹사이트에서는 같은 모델의 검은색도 팔고 있었다. 한정판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품절되겠지? 아무래도 한 켤레 더, 누가 더 알게 되기 전에 빨리 사야겠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어떤 날 어떤 바지에는 분명, 이 침묵하는 듯한 검은색 코트 스니커가 필요한 날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흰색 스니커가 다 낡으면 그때는 또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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