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꿈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2025-11-03

2025년 7월, ‘오픈런’ 열풍을 일으킨 한 베이글 프랜차이즈에서 20대 노동자가 과로로 숨졌다. 유족 측은 주 8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 심야 연장 근무, 제대로 식사조차 못했다는 메시지가 그의 마지막 기록이라며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다. 회사는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여러 증언들은 이와 다른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계는 세 달 단위의 단기 계약, 잦은 지점 이동, CCTV 감시와 사소한 실수에도 작성해야 했던 사건 보고서 등 과도한 통제 시스템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 비극은 인간의 한계를 무시한 노동 구조의 실상을 고통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인간의 한계가 ‘꿈의 노동자’에 대한 환상을 부추겨왔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 청년층의 피로, 감정노동의 일상화는 이미 오래된 문제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새로운 형태로 변주하고 있다. 지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감정 기복도 시간외수당도 필요 없는 완벽한 노동자. 어쩌면 누군가는 AI라면 과로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보자. 과연 기업은 정말로 ‘쉬지 않는 AI’를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축적해 온 진정한 동력은 기계적 효율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작동하는 인간 노동자였다. 계약이 끊길까 두려워하며, 감시 카메라 아래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압박을 견디고, 사소한 실수에도 보고서를 작성하며 모욕감을 삼키는 존재. AI는 이런 감정적 회로에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콜센터의 감정노동 현장은 이 역설을 선명히 보여준다. 기업은 AI를 ‘이상적 상담사’로 도입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AI는 매뉴얼에 따라 친절한 문구를 말할 수는 있어도, 이윤 창출의 핵심인 ‘착한 마음’을 팔 수는 없다. ‘착함’이란 고객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부당한 요구 앞에서 도덕적 고민을 견디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실천이다. AI는 고객의 목소리를 문자로 변환해 분석할 뿐, 그 안의 모욕감이나 절박함에 감응하지 못한다.

더 근본적으로, 기업이 노동자를 극도로 종속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수단은 노동자가 모욕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AI는 어떤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실직의 불안도 모른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축적해 온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능력, 즉 타인과 감정을 주고받는 역량을 AI는 갖고 있지 않다. 효율은 높아질 수 있어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윤리, 책임의 감정은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이 기술적 환상은 낯설지 않다. 인류학자 제니퍼 로버트슨은 일본에서 로봇이 ‘이상적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기술 민족주의’로 분석했다. 그는 일본 사회가 저출산과 고령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로봇을 ‘상상된 공학적 시민’으로 활용한다고 지적한다. 이 로봇은 이민자처럼 사회적 갈등이나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국가에 헌신적이고 순응적이며 불평하지 않는 존재로 상상된다. 즉 기존의 보수적 가치와 정치경제적 현상 유지를 완벽하게 보조하는 존재다.

한국에서는 이 구도가 ‘기술 성장주의’ 담론 속에서, 로봇 대신 AI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이상적 시민’이 국가적 문제의 해법으로 호명된다면, 한국의 ‘이상적 노동자’로서의 AI는 자본의 성장 문제를 해결할 존재로 호출되고 있다. 누군가는 AI가 파업, 태업, 권리 요구, 그리고 과로사 같은 인간적 한계를 제거해 줄 구원투수라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AI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이상적 노동자를 꿈꾸는 사회의 욕망이 빚어낸 조형물이다.

그것은 인간 노동자의 잠재성과 취약성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로서,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드러낸다.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장 불완전하다고 여겨졌던 인간의 감정과 도덕성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런던베이글뮤지엄의 비극은 단순한 과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성실함과 두려움이 시스템 속에서 끝까지 소모된 결과이다.

AI 시대의 노동을 논의한다면, 먼저 우리는 인간 노동자의 정동적 역량이 얼마나 헐값에 취급돼왔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기술의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존엄과 피로를 보호하는 제도와 문화가 필요하다. 인간이 지닌 감정의 깊이와 도덕의 무게를 존중할 때 비로소 ‘꿈의 노동’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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