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서(原書)로 읽는 재미

2024-10-23

 지난 10일 밤 10시, 지하주차장에서 2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즐거운 비명.

“여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대” “그래? 와우” 이건 정말 빅뉴스이자 굿뉴스이다. 속으로 연신 ‘잘했다’ 했다.

문득, 백범 선생의 <나의 소원>중의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한 구절이 생각난 것은 비단 나뿐일까?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아아-, 평생을 조국광복과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이 높은 문화의 힘’이란다.

 여기에서 ‘문화’를 ‘문학’으로 대체하면 어떨까? 세계가 드디어‘한강’의 소설들을 통해 ‘한국문학의 가장 높은 힘’을 공인하고 선포한 것이다. 그 작가가 어떤 소설을 써오고 있는지, 맨부커상을 받을 때부터 주목받은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읽은 적은 없었다.

나는 두 번째 든 생각은 ‘고은 시인이 먼저 받았어야 했는데’와 ‘아니면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가 너끈히 받을 자격이 있는데’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이랴. 이런 경사가 어디 흔한 일인가. 작품 한 편도 읽지 않았지만, 국민이고, 문학 애호가로서 심축心祝하고 또 심축했다. 아내에게 곧장 물었다.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 작품 읽었지? 어땠어?” “너무 핍진해서 읽기 힘들고 가슴이 많이 아파”

 11일 아침부터 도쿄 3박4일 여행하는 동안 <작별하지 않는다>를 정말로 힘들게 가슴 아파하며 겨우겨우 다 읽었다. 아내의 ‘핍진逼眞하다’는 한마디 평은 적확했다. 핍진의 사전적 의미는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는 뜻이지만, 이때의 핍진은 치밀하고 빈틈없는 서사를 의미한다. 나는 왜 이 책을 가슴 아파하며 겨우겨우 읽었는가?

답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이라는 노벨상위원회의 수상 선정이유에 있었다. 역사적 트라우마?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항쟁사건이다. 이를 비켜갈 하등의 이유가 그전에도 없었고 현재는 더욱 없지 않은가. 이 땅의 제대로 된 작가와 예술가라면, 이 어마무시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외면하면 안된다!

 다 읽은 소감을 말하자. 작가의 업보業報이겠지만, 나는 조신하고 음전한 50대 중반의 여성작가(54)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몇 년 전인지, 가수 김창완과 조심조심하면서도 가장 적확한 단어로 자기의 문학을 얘기하는 인터뷰장면도 보았다. 이런 소설을 연달아 쓸 때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머릿속은 얼마나 복잡하고 마음은 또 얼마나 그윽할까. 지독한 고독은 또 어이 하리.

대하예술소설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의 “나는 원고를 쓸 때마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아.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정신의 기둥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이라는 어록도 생각났다.

 작가도 폭력은 안되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신념’을 문학적으로 표출하는데, 폭력적 장면을 빌릴 수박에 없다는 역설을 얘기한다. 작가는 이런 작품들을 쓰면서 독자들보다 마음이 몇 배 더 아팠을 것같다. 오죽했으면 책 속에서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라고 썼을까.

이름도 절묘한 ‘한강’. HAN-RIVER(한강韓江)이다. 유사이래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 그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운명적으로 지은 이름일 터. 멋지다. 올림픽 금메달만 중요한가. 드디어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한강 만세.

 마음으로만 한껏 축하해주자. 이런저런 거추장스럽고 도식적인 행사로 작가를 어지럽히지 말자. 그를 그대로 놓아주어야 한다. 그게 도와주는 것. 보라. 역사왜곡이라느니 상금을 독도사랑에 기부했다는 가짜뉴스 등 말도 안되는 잡소리는 금물. 뉴라이트들의 장난인가. 잔치집에 재를 뿌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왜 판판이 그 모양인가.

시기인가, 질투인가. 벌 받을 게 틀림없다. 지구촌에 큰 전쟁이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띵까띵까할 일이 아니지 않나. “날마다 죽음이 실려가고 있는데, 무슨 잔치냐”는 작가의 말이 맞다.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작가를 우리는 최대한 존중해줘야 한다.

앞으로 6년 동안 세 권의 책을 쓰겠다는데, 조용히 기다리자. 작가의 문학이 어떻게 꽃을 피울지 궁금하다. 일단 <채식주의자>가 읽기 힘들다는데, 오늘은 가을비도 내린다는데, 차분히 읽어볼 생각이다.

어느 평론가(신형철)가 “언젠가부터 그의 새 소설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이 된다.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최명희가 사력死力을 다해 <혼불> 하나 남기고 세상을 떴듯, 한강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쳤는지, 이제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 ‘상처와 치유의 지식체계를 오랫동안 기록해온 신비로운 사관史官’(허유진 평론가) 대신, 따뜻한 봄,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다는데 어떻게 승화시킬지. 

# 부기 1: 한강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 일등 공신은 단연 번역가이다. 데보라 스미스 37),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잊으면 안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런던대학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작품에 매료돼 첫 20페이지를 번역해 영국의 유명 출판사에 보내, 출간을 하게 됐고, 맨부커상을 받게 했다. 그나저나 우리는 이제 노벨문학상 원서 작품을 국역한 번역본으로 읽지 않는다. 어마무시한 특혜가 아닌다. 우리글로 쓰여진 원서를 읽게 되다니.

# 부기2: 소설을 200권이 넘게 쓴 원로작가 한승원은 그의 아버지. “강이의 글은 아무도 흉내낼 수가 없고 따라갈 수가 없다”고 칭찬하며, 수상 소식을 듣고 늙은 아내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왜 아니었겠는가.

 최영록 <생활글 작가. 오수개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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