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았다. 지난 1년은 참 아슬아슬했던 해였다. 작년 이맘때는 하루하루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시민들이 나라 걱정과 ‘계엄성’ 불면증으로 밤잠을 못 이뤘다. 험난할 것이라는 트럼프 2기가 막 출범하는 국제 정세 속에 한국은 미아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동맹은 이제 민주주의나 자유라는 가치가 아니라 돈으로 주고받는 거래가 좌우하게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4월 2일 전 세계 모든 국가를 상대로 관세 폭탄을 안겼다. 자유무역협정 파트너인 한국에도 자동차 및 철강에 25%라는 기존의 품목 관세에 추가해 25% 상호관세, 10% 기본관세가 예고되어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직 대통령 중심의 계엄 세력의 반발 속에 정치적 투쟁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가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외교는 초당적인 연속성이 중요
남북문제 등 미국과 충분히 상의
중국엔 신중하게 대북 협력 요청
‘희망적 사고’ 대신 ‘현실 감각’을

그러나 결국 우리 국민들의 저력이 힘을 발휘했다. 법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탄핵되고 책임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 세계를 향해서 “한국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6월 4일 새 정부 출범 후 놀랐던 것은 외교 노선이었다. 필자는 수십 년 동안 강의나 기고를 통해, 외교는 초당적이어야 하고 연속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 노선이 뒤집어지고, 국제무대에서 한국 외교가 신뢰를 잃는 일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 반일, 친북, 친중 노선으로 치달을 것 같아 우려가 컸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일제 강제징용 제3자 변제 문제에 대한 일본 기자의 질문에 “국가 관계에는 정책의 일관성이 특히 중요하다”고 답했다는 보도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그 후 실제로 한·일 관계와 동맹을 중시하는 정책을 실천해 오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국익 차원에서 이전 정부와의 외교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은 향후 중요 업적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일관성 있는 외교정책 기조 덕택에 위태로웠던 한·미 관계도 상당히 안정시킬 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주미한국대사에게 “나는 이재명 대통령과 최고의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하며 호감을 표했듯, 정상 간의 신뢰 관계도 좋은 느낌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역대 미국 행정부는 한국의 원자력협정 개정 요청을 강하게 반대해 왔다. 그런데 상업적 목적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설까지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일관성 있는 외교 기조와 그것을 실현하려 애쓴 실무진들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2026년 새해에도 수많은 외교 안보 분야의 도전들이 닥쳐올 것이다.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어떻게 미국의 거래 외교, 고조되는 북한의 적대시 정책, 중국의 한·미 동맹 이완 정책 등의 도전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를 관리할 것이냐가 문제다.
중요한 것은 현 정부가 이제까지 펼쳐온 외교 기조를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유지해 나가는 일이다. 특히 남북 관계를 최우선에 놓고 북한에 대해서는 선제적 양보를 해가며 미국과 각을 세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 간 대화 노력은 꾸준히 지속하되, 중요한 대북 관련 조치를 취할 때는 미국과 충분히 사전 협의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득이 된다. 우리가 대북 조치를 일방적으로 취해 가면서 미국과 자꾸 부딪치게 되면, 앞으로 있을 북·미 회담 때 미국이 한국을 소외시킬 명분을 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 협상에서 중요한 제3의 당사국을 소외시키곤 했다. 만일 미국이 단독으로 북핵 동결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거를 맞교환하고 단·중거리 미사일을 방치하면 우리는 그대로 ‘북핵 인질’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최근 DMZ 통과 문제를 놓고 유엔사와 부딪친 것도 조심스럽다.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의 양보를 평화의 신호가 아니라 약점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제 남측은 자기들 손안에 들어왔으니 진짜 주인인 미국과만 이야기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한국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핵화나 평화체제 협상 테이블에서 소외되고 미·북 직거래의 들러리만 서는 셈이 될 수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대북 협력은 정중히 요청하되 우리가 견지해 온 외교 노선을 지키며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중국에 너무 매달리면서 중국을 통해 북한을 움직이려 하면 중국은 “협력할테니 미국 대신 우리와 손잡자”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애써 쌓아온 한·미 협력 기조가 흔들리고 우리 외교는 자율성과 실리 모두를 놓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 대안은 한·미 조선 및 제조업 협력 심화다. 그것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으로 하여금 ‘한국은 MAGA 프로젝트의 필수적 파트너이기 때문에 지켜줘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적 실리와 우리의 안보적 요구를 패키지로 엮어 북·미 협상에서 한국의 요구를 반영하게 만들고 핵협의그룹(NCG)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대북 억제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호주 등 유사 입장국들과 연대해서 미국의 일방적 결정을 견제해야 한다.
힘이 난무하는 지금 같은 난세에서 우리가 버릴 것은 막연한 ‘희망적 사고’이고, 취할 것은 냉철한 ‘현실 감각’이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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