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포섭된 ‘나’는 ‘내’가 아니다

2024-11-28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지음 | 이진 옮김 | 푸른숲 | 248쪽 | 1만8000원

오늘날 ‘진정성’이라는 단어만큼 남용되는 표현도 드물다. 진정성은 정치인의 언행에서부터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신뢰성에 이르기까지 타인에 대한 대중의 찬사와 비난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고, 대통령실은 영부인의 월권 논란에 ‘여사의 진정성을 헤아려달라’고 해명하며, 리얼리티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과거 경력을 두고 ‘진정성’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삶이나 예술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영국 문화비평가 에밀리 부틀의 첫 저서인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진정성 문화’의 모순과 역설을 ‘셀럽’ ‘예술’ ‘제품’ ‘정체성’ ‘순수성’ ‘고백’ 등 여섯 가지 키워드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진정성은 “각 개인에게 실현해야 할 고유한 자아, 맞추어 살아야 할 자신만의 진리가 있다는 개념”에 가깝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는 타인이나 외부의 방해에 맞서 추구해야 할 진정한 내면이 있다는 인식이다. 자아의 개성을 중시하는 서양과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는 동양에서 진정성의 가치는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았다.

2010년대 이후 소셜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저자는 “진정성은 자본주의에 포섭되면서 그 의미를 잃었고, 전통적인 성공의 개념에 영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더 ‘당신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품들만 양산했다”고 비판한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셀럽’은 오늘날 ‘진정성 문화’가 처한 역설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다. 파파라치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던 과거의 스타 배우들과 달리 오늘날 셀럽은 자신의 사생활을 판매한다. 킴 카다시안은 연인과의 섹스 테이프가 유출되며 유명세를 탄 뒤 몇 달 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리얼리티 쇼를 시작했다. <카다시안 따라잡기>의 카메라는 카다시안 자신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매들의 일상까지 공개한다. “카다시안 가족은 그들 자신의 파파라치가 되었다.”

카메라에 비친 카다시안 가족의 일상에는 진지함이라고는 없다. 부와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허장성세가 전부다. 대중들도 이들의 일상이 실제 삶이라기보다는 연기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러나 카다시안 가족들은 자신들의 삶이 가식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고백’함으로써 진정성 있다는 인상을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카다시안 가족은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한 적이 없다. 그들은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가짜임을 인정하는 한 그들은 (비난의 총알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해줄) 방탄복을 입은 셈이다.”

진정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집착은 문학 창작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독자들이 소설에서 “자아의 흔적”을 찾는 경향 탓에 “예술가들의 작품에 불필요한 추궁을 하게 되었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논쟁하게 되었으며 때로는 예술을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작가의 진정성을 찾으려는 집착은 ‘소설=허구’라는 관념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작가들은 ‘개성의 소멸’을 작품의 미덕으로 삼고 ‘자전적’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했으나, 요즘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자전적 소설’(오토픽션)이 유행한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강화될 경우 작가들이 외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 출신 영국 소설가 모니카 알리는 방글라데시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18세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 <브릭 레인>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이 실패하자 절필을 선언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방글라데시 출신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소재는 “진정성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영미권에서 출현한 ‘힙스터’는 ‘자본주의에 포섭된 진정성’을 웅변한다. 유행에 민감하고 개성을 중시하며 매끈한 공산품보다는 장인의 손길로 만든 투박한 수제품을 선호하는 힙스터의 취향은 주류문화에 대한 반문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경박한 팝 문화를 상징하는 CD나 MP3 대신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인 LP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고, 디지털카메라 대신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또 스타벅스를 경멸하고 공정무역 원두를 로스팅한 ‘제3의 물결’ 커피를 마셨다. “힙스터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개척하고 내면의 자아가 이끄는 진정한 정체성을 구축한 듯 보였다.”

그러나 아무나 힙스터가 될 수는 없다. “진정성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는 힙스터리즘의 독특한 방식을 따르려면, ‘올바른’ 제품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힙스터들은 도시를 고급화했고, 자신들의 눈에 멋지지 않으면 그들이 외모를 가꿀 여유가 있는지 배려하지 않고 무시했다.”

책의 원제는 이다. 저자는 ‘진정한 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것을 권한다. “진정성은 본래 자유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교리가 될 때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역설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개념에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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