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농촌 누비는 ‘국민 안내양’…“어르신들과 함께 울고 웃죠”

2024-10-29

“세월길 따라 인생길 따라 시골 버스 달려 갑니다.”

KBS ‘6시 내고향’ 애청자라면 매주 듣는 이 노래, 방송인이자 트로트 가수인 김정연씨(54)의 ‘고향버스’다. 김씨는 2010년부터 15년째 농촌 버스에서 어르신들을 만나 삶의 희로애락을 들어보는 코너 ‘시골길 따라 인생길 따라’에 출연 중이다. 매주 농촌 마을을 누비는 김씨를 22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KBS 신관 카페에서 만났다.

김씨는 1991년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로 활동하며 연예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라디오 리포터로 13년간 일했다. TV 방송을 하고 싶어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던 중 ‘6시 내고향’의 섭외 연락을 받았다. 국민 프로그램에 출연을 제의받아 뛸 듯이 기뻤지만, 그에게 고민이 생겼다.

“하필 촬영일과 친한 지인의 결혼식 축가 선약이 겹친 거예요. 결국 축가 부르는 것을 택했고, 제 자리는 다른 진행자가 차지했죠. ‘6시 내고향’과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주에 진행자를 바꿔서 저와 하고 싶다며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그 덕에 처음엔 몇화만 방송하기로 예정됐던 ‘시골길 따라 인생길 따라’는 큰 인기를 끌며 계속 이어졌고, 김씨에겐 ‘국민 안내양’이란 별명이 붙었다. 4년째 달리던 시골 버스는 2013년 하반기 휴식을 맞게 된다. 김씨의 임신 때문이었다.

“40대 중반 임신부로 종일 야외에서 촬영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농촌에서 직접 만나는 어르신들, 매주 TV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시청자들이 아른거려 그만둘 수 없더라고요. 또 간절히 바랐던 TV 프로그램 고정 자리를 내려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임신 7개월차에 접어들고 건강이 걱정된다는 제작진 만류에 하차를 결정했어요. 마지막 촬영 날 농촌 주민분들이 2m짜리 미역을 주시며 순산을 기원해주시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출산 후 다시 ‘6시 내고향’에 출연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건 김씨의 기우였다. 아이가 100일이 됐을 무렵부터 그는 다시 농촌 어르신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를 간절히 찾는 전국의 시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길 따라 인생길 따라’가 방영되는 건 15분 남짓. 김씨는 이 15분을 만들기 위해 새벽 3시에 서울을 떠나 농촌에 도착한 뒤 오전 8시부터 시골 버스 첫차에 오른다. 대본도, 정해진 출연자도 없다. 여러 버스를 타고 내리며 즉석에서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버스에 타면 처음 보는 어르신들이 저를 딸처럼 반겨주세요. 자식들이 나만 빼놓고 여행을 다녀서 섭섭하다, 죽은 영감이 젊어서 도박하고 바람을 피워서 고생했다 같은 속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곤 하시죠. 방송에 출연하신 어르신의 아들로부터 ‘어머니가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는데 얼굴을 영상으로 남겨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르신들 인생사에 함께 울고 웃곤 해요.”

지난해부턴 전문가와 함께 농촌 마을을 찾아 주민들의 소장품 가치를 알아보는 KBS ‘우리집 금송아지’의 MC로도 활약 중이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농기구부터, 오래된 도자기, 등불, 책 등 다양한 물건을 소개한다. TV로 보는 민속학 사전인 셈이다.

“어느 어르신 집에 오래된 도자기가 있었는데 고물상이 1만원에 팔라고 하더래요. 어르신은 그 돈 받고는 못 판다며 거절하셨죠. 촬영하면서 전문가 감정을 받았더니 150만원으로 판정된 거예요. 돈을 떠나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되고, 인정받아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 뿌듯합니다.”

40살에 처음 ‘6시 내고향’에 출연했던 김씨는 어느덧 방송 초기에 봤던 어르신들의 나이인 50대 중반이 됐다. 버스에서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다 보니 관절염이 생기고, 매주 서울과 지방을 왔다 갔다 하는 스케줄이 벅차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르신들 때문에, 또 어르신들 덕분에 그는 이번주에도 시골 버스에 오른다.

“얼마 전엔 촬영장에서 사주를 보는 어르신을 만났어요. 제 사주를 보더니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참 많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방송을 하면서 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전국에 계신 시청자들이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더라고요. 이분들이 계시는 한 영원히 국민 안내양으로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황지원 기자, 사진=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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