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 저항’ 머리띠 매고, ‘덕질’하던 카메라 들고…말벌 동지는 투쟁하러 간다

2025-03-29

남태령 대첩 이후 소규모 투쟁사업장 연대하는 ‘말벌 동지들’

‘시민 힘 모으면 바뀐다’는 경험…“더 많은 연대로 잼투하자”

[주간경향] 12·3 비상계엄 이후 나타난 ‘말벌 동지’를 아십니까. 말벌 동지는 하청노동자와 해고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에 말벌 아저씨처럼 순식간에 뛰어가 연대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남성이 말벌이 나타나자 꿀벌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뛰어가는 ‘말벌 아저씨’ 밈(meme·온라인상의 유행어)에서 유래했다.

말벌 동지들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기자는 말벌 동지 1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로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이다. 16명 모두 2030세대였고, 여성 또는 성소수자였다.

각자의 활동 계기와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말벌 동지로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시민이 힘을 모으면 불합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타인과 연대를 해야 할지 그 방법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들은 비장하고 엄숙했던 기존 노동조합의 투쟁 분위기를 바꾸고, 연대와 연대를 잇는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말벌 동지들의 ‘다시 만난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봤다.

인터뷰에 응한 말벌 동지들 대부분은 계엄 이전엔 사회참여를 아예 해보지 않았거나, 해봤더라도 적극적이진 않았다고 했다. 민주노총이라는 단어는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노동자들의 투쟁에 시민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이들은 계엄 이후 서울 여의도·광화문 등지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 나갔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21~22일 이른바 ‘남태령 대첩’ 때 “새로운 세상”을 접했다고 했다. 농민들이 왜 트랙터 시위를 하는지가 X(엑스·구 트위터)에 올라왔고, 1박2일 집회에선 여성, 성소수자, 인종, 장애인, 노동자 차별 등 다양한 사회의제에 대한 발언이 쏟아졌다.

대학생 때 사회참여를 해본 경험이 있는 김남희씨(30)는 남태령 대첩 이전과 이후 인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김씨는 “예전에는 집회에 가도 내 의제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며 “해고노동자, 농민들의 의제에 내가 왜 연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리적인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았고, 그 답이 없는 상태에서 연대하는 게 맞나 싶었다”고 했다. 그는 “남태령 대첩이 각별했던 이유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저 사람들도 나를 이해하는구나, 나도 저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구나라는 단서가 조금 보였다는 것”이라며 “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가 듣는 만큼 나의 이야기도 받아들여지고 들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됐다”고 했다.

남태령 대첩은 ‘성공의 경험’이기도 했다. 시민들이 경찰에 항의한 끝에 트랙터가 한강진까지 행진할 수 있었다. A씨(21)는 “남태령 대첩을 보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문제가 해결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어디든 나 한 명이라도 가면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남태령 대첩을 겪은 이들은 지난해 12월 말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가 연 새해 해돋이 문화제로 향했다. 거통고지회가 남태령 시민들이 거제에 와주면 좋겠다는 ‘초대장’을 보냈다. “초대장 받았는데 가야지”라는 밈과 함께 말벌 동지들이 거제로 갔다. 300명 가량이 몰려 노조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청노동자의 현실, 노동조합법 개정 필요성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말벌 동지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부각된 것은 거통고지회가 서울 종로구 한화 건물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하면서 사측과 충돌이 벌어진 지난 1월 7일이었다. 거통고지회는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에 원청인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이 나서라고 요구해왔다. 한화 측이 조합원들을 무력으로 막는다는 소식이 X에 퍼지면서 말벌 동지들이 현장으로 뛰어갔다. 말벌 동지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현장을 지켰고, 이게 본격적인 말벌 동지 연대의 시작이었다.

투쟁 노동자와 같은 청년의 삶

계엄이 시민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었다면, 각 투쟁사업장에선 사용자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진다. 요지경(활동명·25)은 “뛰어가 농성을 지켜보고 하룻밤을 새우고 아침에 집에 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는데 세상이 달리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남태령이 우리가 의제에 닿는 기회였다면, 한화는 직접적으로 사측과 노동자의 큰 대립이 눈앞에서 일어났던 것”이라며 “대한민국 노동 현실의 최전선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하청노동자였기 때문에 연대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말벌 동지들은 그때부터 이곳저곳으로 달려갔다. 경영 악화를 이유로 정리해고된 세종호텔 노동자들, 외국자본의 한국공장 철수와 함께 해고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 학교 내 성폭력을 해결하려다 부당 전보·해임된 지혜복 교사,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선전전을 벌이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등이다.

‘더 마음 가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메탈말벌, 호텔말벌, 옵티칼말벌, 교육청말벌, 구르는시민연대 등으로 불린다. 말벌 동지들은 집회와 문화제에 참석하고, 농성장의 텐트에서 밤샘을 한다. 투쟁몬 맹살미(활동명·29)는 “계엄 전에 폐건물 옥상에 옵티칼 두 여성이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다고 해 후원을 한 적은 있지만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지는 않았다”며 “계엄 이후 탄핵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많은 투쟁 현장을 공유해주면서 내가 힘을 보탤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나가보자 싶었다”고 했다. 맹살미는 “그 뒤로 집에 있은 날이 없다. (집을 청소할 시간이 없어) 농성장이 우리 집보다 깨끗할 정도”라고 했다.

말벌 동지들은 자신의 모습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했다. 맹살미는 “(말벌 동지나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 사회가 말을 들어주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다들 소외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아무리 저 사람들이 힘든 것을 알아도 내 생활과 내가 힘든 게 먼저가 되죠. 그런데 실은 저 사람들이 힘든 이유는 제가 힘든 이유와 같다고 볼 수 있거든요. 권력이 약자를 탄압하는 방식은 똑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에 늘 분노했지만, 한 번도 스스로 행동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한 적이 없었어요. 계엄이 터지고, 각자의 사업장에서 불의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나 혼자는 힘들 수 있겠지만 같이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저도 부당한 일을 많이 겪었고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혼자 있었거든요. 계엄을 통해 전 국민이 권력의 폭력 대상이 됐고, 같은 마음으로 나가게 된 것이죠.”

30대 후반의 범깡총연대(활동명)는 말벌 동지들의 연대에 대해 “이미 현생(현재의 인생)이 망할 대로 망해서, 저 하청노동자들이 사측에 밀리면 그다음엔 내가 된다는 것을 아는 친구가 많다”고 했다. 20대 후반의 레어(활동명)는 “그전부터 노동자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계엄 이후 광장에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나태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고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게 명확해졌다”고 했다.

노동운동 언어 적극 차용+패러디

말벌 동지들은 대부분 ‘덕질’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 덕질 경험은 투쟁 방법으로 활용됐다. 깃발엔 자신이 덕질하는 분야와 관련된 문구를 넣어 정체성을 드러내고, 각종 스티커와 배지 등 굿즈도 자체 제작한다. 20대 온화(활동명)는 뮤지컬 덕질을 하려고 산 카메라를 투쟁사업장에 들고나왔다. 그는 “집에 놀고 있는 카메라가 있는데 닳는 것도 아니고, 투쟁사업장 기록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사진을 찍게 됐다”고 했다. 송예은씨(24)는 “처음에 시위 나갈 때 한 말이 ‘나의 오타쿠 친구들아, 너희들이 맨날 하던 거 여기 나와서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저도 대포 카메라를 갖고 다녔다”며 “(아이돌의) 뮤직뱅크 출근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정근식(서울시교육감) 출근길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인터넷 방송을 덕질했던 칠공이(활동명·28)는 계엄 이후 ‘탈덕’했다. 칠공이는 “(인터넷 방송 분야에) 계엄이라는 소재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고 혐오 발언도 많다”며 “계엄 이후 더 못 버티겠어서 탈덕을 했다”고 했다. 대신 깃발엔 좋아하는 웹소설에 나오는 문장을 패러디해 ‘탄핵이 아니면 죽음을 발동’이라고 써넣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주로 일하는 노동자인 그는 ‘5인 미만 사업장 연월차 의무지급 추진(비공식)위원회’ 깃발도 만들었다.

말벌 동지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기존 노동운동의 언어,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또 패러디한다는 것이다. 계엄 이전엔 민주노총이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지 몰랐거나, 귀족노조 프레임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다는 말벌 동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이마에 머리띠를 매고 노조 조끼를 착용한다. ‘동지’, ‘투쟁’, ‘저항’ ‘농성’ 등의 단어를 가감없이 쓴다. X엔 투쟁 정보를 공유하는 계정도 여러개 생겼다. 노조가 아니라 말벌 동지들이 운영하는 계정이다.

‘농성’이라는 의미를 이번에 제대로 처음 알았다는 A씨는 ‘단결 투쟁’ 머리띠를 매고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A씨는 투쟁 현장에서 멜로디언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다시 만난 세계, 그 밖의 각종 민중가요와 투쟁가를 연주한다. B씨(21)는 계엄 이후 당근으로 구매한 플루트를 투쟁 현장에서 연주한다. B씨는 “소리를 지르면 목이 아프니까 악기를 하나 구해야겠다, 적당히 소리 크고 멋진 것 중에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하다가 플루트가 괜찮아 보여서 연주하게 됐다”며 “처음엔 민중가요가 잘 안 들어본 노래이기도 하고 어려웠는데, 연주하면 좋아해 주고 행진 차량에서 자주 나와서 재밌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 말벌 동지들은 ‘메탈 저항’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자체 제작했다. 김솔씨(29)는 “메탈(음악)을 좋아하는데 ‘헤비메탈은 중금속이다’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집회 현장에 나갔다”며 “그러다 보니 메탈을 좋아하는 동지들을 알게 됐고 굿즈도 만들게 됐다”고 했다.

비장했던 투쟁, 이젠 ‘잼투하자’

말벌 동지들의 등장으로 과거 비장하고 엄숙했던 노조의 투쟁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시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잼콘(재밌는 콘텐츠)’을 기획하는 게 대표적이다. 거통고지회에선 잼콘 일환으로 말벌 동지들과 함께 ‘무지개조선소’를 차리고 모형 배인 ‘연대투쟁호’를 만들었다.

농성장 허들도 낮아졌다. 농성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과제나 게임을 하는 말벌 동지들도 있었다. 비롯(활동명·32)은 “예전에 투쟁사업장 연대를 종종 다녔는데 그때랑 굉장히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예전엔 비장함이 흘렀다면 지금은 SNS에서 우스갯소리로 ‘잼콘 있으니까 모여라, 잼투(재밌게 투쟁)하자’고 한다”고 했다. 그는 “깃발이 노조원이 아닌 외부 시민의 연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각적인 상징이 됐다”며 “투쟁을 하고 있지만 힘내서 하자는 에너지,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투쟁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말벌 동지들과 교류하기 위해 X에 새 계정을 만들고, 반대로 말벌 동지들은 노조 소식을 접하기 위해 안 쓰던 페이스북 계정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허지희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사무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농성장은 원래 낮에 한 명이 지키고 좀 쓸쓸한 곳인데 말벌 동지들이 오면서 투쟁에 엄청난 에너지와 기운을 주고 있다”며 “말벌 동지들끼리 악기로 협주를 하고, 몸짓을 연습하고, 롤링페이퍼를 쓰는 등 프로그램을 만든다. 어마어마한 활기가 생겼다”고 했다.

말벌 동지들의 연대는 일방적인 시혜적 활동이 아니라 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 또 다른 말벌 동지들과 교류하는 장으로 작동한다. 30대 김진아씨는 “(노조 조합원들이) 가족보다 더 가족이 된 것 같다”며 “내가 이렇게 기운을 받고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해주고, 더 넓은 세상을 배우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비롯은 “이제 투쟁 현장에 나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며 “X에서 교류한 사람이 현장에 간다고 하면 같이 연대한다는 감각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고 했다.

연대는 또 다른 연대로 이어진다. 말벌 동지들이 투쟁사업장에 연대하자 거통고지회와 세종호텔지부, 지혜복 교사 등이 동덕여대 사태에 연대하고, 이들이 또 다른 투쟁사업장에도 연대를 하는 식이다. 김남희씨는 “연대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말벌 동지”라고 했다. 소속이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개인들이라도 어떤 사안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면 달려드는 모습이 연대의 본질이 아니냐는 취지다.

“투쟁 현장 가니 사람이 보였다”

말벌 동지들은 투쟁사업장 연대로 자신의 삶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메타몽(활동명·34)은 “처음에 광장에 나갔을 땐 탄핵에만 집중하고, 이게 끝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여러 곳에 연대를 다녀보니 먼 일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메타몽은 “투쟁 현장에서 서로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조심해서 말하는 그 연대의 대화들이 아주 소중했다”며 “그렇다 보니 내 원래의 일상, 회사나 친구들의 혐오 표현이 불편해졌고, 오히려 동지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일상이 투쟁에 방해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정말 그렇다”고 했다.

김솔씨는 “(투쟁 현장에) 가보기 전에는 막연하게 의제였고, 사안이었고, 사태였다”며 “가보고 나니까 이제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노력으로, 자기의 피와 살을 깎아서까지 이렇게 불의와 싸우고 있는지가 느껴졌던 것”이라며 “그 뒤로는 ‘나의 일’이 되고, ‘내 사람의 일’이 됐다. 더 이상 외면하고 남의 일로 취급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김선빈씨(26)는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서 서울까지 걷는 희망뚜벅이 행사에 참여한 뒤 “공동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고 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고공에 계시는 분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연대의 의미로 시작했다”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람을 만나고 우리의 공동체가 살아 있다, 우리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는 게 정말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후 다른 말벌 동지들과 함께 구미역에서 한국옵티칼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으며 ‘셀프 뚜벅이’도 했다. 김씨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존중하며 함께한다는 게 긍정적인 느낌을 줬다”고 했다.

대학생인 C씨(24)는 “성소수자로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던 때에 저를 살고자 만들었던 게 광장의 무지개 깃발들과 민주노총의 무지개 머리띠, 그리고 수용의 경험이었다”고 했다. C씨는 “그런 것들이 저를 광장에 나오게 했고, 실제로 나왔을 때 평등수칙이 있었고 성소수자들을 만나면서 안전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남태령 대첩 때 “딸들아, 수고했다”고 한 중년 남성에게 “저희가 사실은 딸들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알아두겠다”고 답했다는 글이 X에서 화제가 됐다. 혐오와 차별 없이 누구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거통고지회와 옵티칼지회는 농성장에 성중립화장실을 설치하고, 혐오와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수칙을 적용하기도 했다.

온화는 자신이 ‘세월호 세대’로서 이번 연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저는 세월호 세대예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경험적으로 깨우친 세대죠. 그런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연대를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알아버린 이상 더 이상 흐린 눈 못해”

말벌 동지들의 연대는 계속될 수 있을까. 윤 대통령 파면이 이뤄지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연대의 힘은 지금보다 줄어들 수 있다. 연대의 폭을 넓히는 것은 과제다. 그래서 일부 말벌 동지는 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거통고지회 조합원이 된 요지경은 “탄핵 이후에도 우리의 투쟁은 이어나가야 한다”며 “누군가는 복직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안전한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혼자서 거리에 나설 수 있어야 하는데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다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김형수 거통고지회장은 결국 지난 3월 15일 한화 건물 앞 30m 높이의 CC(폐쇄회로)TV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옵티칼과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고공농성도 끝나지 않았다.

조직화가 필요한지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하다. C씨는 “연대가 많을수록 쉽게 문제를 덮지 못한다는 점에서 폭넓은 연대는 가장 중요하다”며 “누구나 연대할 수 있고, 당신은 외부인이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고 했다. C씨는 ‘투쟁’이라는 단어 아래에 ‘누구나’라는 단어가 함께 쓰인 깃발을 집회에 들고 나간다.

C씨는 “말벌 동지라는 이름이 붙고 집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 연대가 나와는 상관없는, 동떨어진 먼 이야기처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시민이 연대하는 사안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 또 아직 남아 있는 (노조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서라도 평범하고 흔한, 후줄근한 대학생 같은 옷을 입고 집회에 간다”고 했다. 그는 “제가 요즘 다니는 모든 투쟁장이 그 각각의 분야에서 선두에 서 있는 곳들”이라며 “하나하나의 투쟁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결국엔 다 사회문제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좋겠다”고 했다.

말벌 동지들은 연대의 끈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이 빨간 약을 먹고 진실을 안 것처럼 칠공이는 “더 이상 이전처럼 ‘흐린 눈’ 하고 살 수는 없게 됐다”고 했다. 온화는 “모르던 것을 알게 된 게 말벌 동지들의 원동력”이라며 “모르면 모르고 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 사람이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연대를 계속하게 된다”고 했다. 김솔씨는 “내 일이 아니어도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며 “표면적으로 연대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연대한 기억은 계속 남을 것”이라고 했다.

김선빈씨는 말벌 동지들의 연대를 계기로 공동체가 회복됐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저 같은 사람이 많이 늘어나 스무 명, 서른 명 정도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가 세상을 가득 채우면 좋겠어요. 청년 문제 대부분이 공동체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적 불평등까지 겪으니 발생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높은 자살률도 문제이고 활동을 포기하고 숨는, 소외되는 청년이 많잖아요. 말벌 동지가 확장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안전망이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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