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체념과 침묵에 길들여진 ‘병든 사회’

2025-06-25

비정상이 만연돼 되레 정상인 양 받아들여

부조리에 무감각, 변화 열망도 사라져 위험

지하철 안에서 한 승객이 스마트폰 스피커로 드라마를 본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탓에 대사와 웃음소리, 효과음이 고스란히 주변에 울린다. 불편함이 공기처럼 떠돌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는다. 분명 상식 밖의 행동인데도 모두가 애써 모른 척하며 넘어간다. 인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까지, 이런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우리 삶에는 완벽한 규칙 준수보다는 적당한 융통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잠깐의 실수나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이해심을 갖고 넘어가는 것은 따뜻한 배려다. 어쩌면 공공장소에서 소음을 일으킨 이도, 인도에 오른 배달원도 각자 다급한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너그러움이 반복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없을까?

잘못을 지적하는 용기가 예민함이나 참견으로 치부되니 사람들은 점점 더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불편을 감내하는 쪽이 일상이 되고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예외가 된다. 처음엔 분명 눈에 거슬렸지만 반복될수록 익숙해지고 비정상이 어느 순간 당연해진다.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이럴 때 떠오르는 개념이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가르친 인류학자 알렉세이 유르차크는 소련 말기의 이상한 안정성을 설명하며 ‘초정상화(hypernormalisation)’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후기 소련 사회를 “모두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안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행동했던 시대”로 설명했다. 비정상이 만연해서 정상인 양 받아들이게 되고,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알 수가 없으니 결국 그저 ‘괜찮은 척’, ‘문제없는 척’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현실에 무감각해진 상황을 두고 유르차크는 초정상화라고 개념화했다.

초정상화는 특정 시대나 정치체제를 향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꾸며낸 일상, 과장된 감정, 조작된 이미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연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진실보다 진실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이 인터넷을 타고 더 빠르게 확산되고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가 진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허구는 강화되고, 결국 모두가 그것을 정상이라고 믿게 된다. 정치인이 거짓을 말하고 사실을 왜곡해도 그것을 지적하는 이에게 “그게 뭐가 문제냐”라며 반문하고 우겨버리면 그럴듯한 정상으로 자리 잡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나중엔 그저 입을 닫게 된다.

초정상화의 진짜 위험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부조리한 소식들에 놀라움조차 느끼지 않고 무심히 넘겨버리게 된다. 끔찍한 뉴스들이 우리를 덮쳐도 “어쩔 수 없잖아요”라며 체념한다. 변화에 대한 열망도 사라진다. 이런 현실을 오래 견디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 무기력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슬플 때 눈물 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이상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마음이 아직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말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비정상을 정상으로 자기 안에 내면화한 것이다. 비정상에 대한 무반응이 생존의 기술처럼 여겨진다면, 이건 정상에 대한 인식이 병들었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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