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속의 야만

2025-04-20

지난주 미국의 한 이사회 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회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우리도 홈페이지에서 다양성(diversity), 공정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라는 단어를 빼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미국에서는 대학은 물론, 학문과 고등교육 관련 기관 전반에 걸쳐, 이 세 단어를 지웠느냐 안 지웠느냐에 따라 해고가 엇갈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하버드·코넬·프린스턴 등 미국 최고 명문 대학들에 지원되는 수십억 달러의 연방 자금을 전격 동결했다. 표면적으로는 반(反)유대주의와 같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는 대학의 핵심 가치인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이 자유가 사라지면 지적 추구도 그 의미를 잃는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 인재들이 꿈꾸는 지적 우수성의 상징인 나라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엘리트 대학을 혐오하는 포퓰리즘적 반(反)지성주의가 정부 차원에서 제도화되고 있다.

“하버드가 애초에 왜 우리가 낸 세금 22억 달러나 받아 써?” 이것이 미국 대중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반응이다.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와 고등교육과 연구에 대한 무지가 함께 스며 있다. 암 치료제 개발, AI, 환경 연구, 감염병 대응, 심지어 국방기술을 위한 자금 투자가 고등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가 그 혜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자금 동결 조치로 인해 이 같은 연구들이 대거 중단되었고, 세계 지식 생태계를 이끌어온 미국의 역할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대학과 연구 기관을 대상으로 행하고 있는 정치적 보복은 결국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지적 리더십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미국의 근간이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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