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 센트럴에 기반을 둔 갤러리 빌팽(VILLEPIN)은 미술 애호가라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손꼽힌다. 프랑스 전 총리 도미니크 드빌팽과 그의 아들 아서가 2020년 가문의 이름을 걸고 문을 연 이 갤러리는 새로운 전시를 열 때면 작품뿐 아니라 공간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각 문화의 정체성이 담긴 가정집에서 여는 ‘하우스 전시’는 빌팽의 전매특허다.
그 빌팽이 한국에서 두 번째 전시를 연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갤러리의 설립자 아서 드빌팽은 “우리의 핵심 아이디어는 컬렉터들을 집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뉴욕에서 볼 수 있는 전시를 그대로 복제해 서울에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라며 “한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예술과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는 2년 만에 개최하는 서울 전시를 위해 신중하게 공간을 골랐다. 2023년 서울 성수동 갤러리에서 연 첫 전시가 소속 작가 강명희를 집중 조명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전시는 갤러리 빌팽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서울 청담동 단독주택을 개조한 이유진갤러리에서 다음 달 1일까지 열리는 전시 ‘바람과 시간을 넘어(Across Wind and Time)’에는 한국의 강명희와 중국 현대미술 거장 자오우키, 프랑스의 마리 드빌팽 3인이 참여한다. 강명희의 명상적 풍경화로 시작해 자오우키의 대담한 추상화와 서정적 수채화를 만나고 마리 드빌팽의 격정적인 회화로 도착하는 구성이다.
이들은 빌팽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일례로 자오우키는 빌팽 가족과 오래 교류했을 뿐 아니라 아서가 처음 수집한 화가이고 마리는 그의 누나다. 강명희에 대해서도 그는 “강명희는 아버지와 25년 이상 교류했고 나 역시 대여섯 살 때부터 그의 작품과 함께 자랐다”며 “대학을 가기 위해, 사업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마다 나는 강 작가의 그림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5년 전 갤러리를 시작해보자고 결심했을 때도 강명희를 먼저 떠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꼭 집이어야 할까. 그는 “아마 역사상 첫 갤러리는 집이 아니었을까”라며 “과거의 컬렉팅 문화로 돌아가자는 의미”라고 짚었다.
“18세기 유럽의 ‘살롱’ 같은 겁니다. 컬렉터와 예술가는 살롱에 모여 예술을 즐기고 논하며 더 나은 예술을 만들고자 함께 노력했습니다. 큐비즘도, 인상주의도 이렇게 탄생했죠. 이것이 바로 문화가 성장해온 방식이자 빌팽이 추구하는 ‘예술과의 대화’입니다.”
그의 말은 글로벌 대형 갤러리와 국제 아트페어(미술품 장터) 중심으로 굴러가는 오늘날의 미술 생태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도 들린다. 실제 외교관이자 전 총리였던 아버지를 따르듯 정치학과 국제 관계를 공부했던 그가 갤러리 운영이라는 뜻밖의 길로 방향을 튼 계기는 홍콩에서 대형 ‘아트페어’를 만나면서다. 아트페어는 다양한 예술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하는 흥미로운 이벤트지만 미술계의 ‘페어 쏠림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아서는 “세계의 주요 페어만 돌아도 갤러리는 1년에 스물다섯 번 이상 전시를 해야 한다”며 “페어에서 보여줄 작품을 위해 수십 명의 아티스트와 작업해야 하는데 이래서는 소속 작가의 얼굴도 모를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미술품을 수집하는 컬렉터에 대해서도 “컬렉터가 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소수의 작가를 지원하는 일이지 ‘값이 오를 것 같은 작품’을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짚었다.

그는 유행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진지한 컬렉션을 구축하려는 컬렉터들을 위해 빌팽을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컬렉터-작가-예술’이 선순환하는 진짜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 맥락에서 서울은 빌팽이 활동 반경을 본격적으로 넓힐 장소로 주목하는 도시 중 한 곳이다. 그는 “유망한 작가가 자본이나 권력에 꺾이지 않은 채 더욱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티’는 매우 중요하다”며 “작가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보다 5년 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컬렉터는 물론 예술의 발전에도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서는 인터뷰 내내 예술의 중요함에 대해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예술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완벽함에 집착했던 내가 강명희가 그린 자연 그대로의 추상을 보며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며 “예술이 위대한 것은 이처럼 우리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우리의 삶이 그림 덕분에 변화할 때, 집에 걸린 그림 앞을 지나며 전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무척 행복해질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예술을 좀 더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