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잔] 발레니스크

2025-09-12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펼쳐지는 무대. 의자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은 마네킹 같은 얼굴, 그림으로 된 몸을 지니고 있다. 둘 사이의 균형을 흔들 듯 그사이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창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괴이한 형체가 방안을 들여다본다. 의자와 인물, 창문까지 딱 맞춰 재단한 듯 질서정연한 구도지만 그 안정감 속엔 오히려 낯선 긴장이랄까, 불안이 스멀댄다. 사진가 로저 발렌은 50여 년에 걸쳐 자신만의 독창적 미학으로 완성한 작업을 발레니스크(Ballenesque)라 부른다.

뉴욕에서 태어난 발렌은 매그넘(Magnum·보도사진작가 그룹)에서 근무한 어머니 덕분에 사진예술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인종분리와 불평등, 불안과 긴장이 여전히 뒤엉켜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하면서 사진적 시선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남아공 주변부와 소도시를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기록하던 초기 작업을 지나 1990년대 이후 그는 연출과 상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사진을 심리적 연극 무대로 발전시킨다. 폐쇄적이고 밀도 높은 발레니스크 무대, 그곳엔 인물과 동물, 그림과 오브제들이 유기적으로 쌓인다. 수많은 변수를 다뤄야 함에도 그의 사진 속엔 모든 요소가 존재 이유가 있고,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하기에 뇌리에 남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서로를 침범하는 이미지들.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지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잠재의식 속에 둥지를 트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발레니스크 무대가 보여주는 이 세계는 단순한 낯섦으로 끝나는 대신 잠재된 기억과 감정을 불러내는 ‘내면의 무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찬찬히 발렌의 ‘Visitors’와 마주해 보자. 아름다움과 추함, 유머와 비극, 현실과 초현실이 공존하며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들. 그 경계를 지켜보는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차오르는지 궁금하다. 발레니스크 무대는 여러분의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