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뮤지엄 특별展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
국내외 작가 13인 참여… 불완전함 인식 때 싹트는 이해·연민 탐색
수 백개의 유리전구… 컨베이어벨트 클락… 몰입형 테마공간 압도
두어 걸음 성큼 내딛기조차 어려울 만큼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면 수 백개의 유리전구가 우주 공간의 행성들처럼 가득 떠 있다. 관객이 주변 센서에 숨을 불어넣자, 전구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발하는데 하나의 호흡이 전체 공간을 밝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숨은 가장 연약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각각의 유리전구는 색깔과 모양, 내부의 기포까지 모두 다르다. 표면에는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주소 번지수를 새겨, 각 전구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하나하나 고유한 개별자임을 나타낸다.
관객의 숨과 만나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일은 곧 인간 회복력의 상징이자 ‘살아있다’는 선언이 된다. 트라우마를 겪고 고통받은 각각의 생존자들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빛을 선사한다.
개인의 상처가 집단 치유의 에너지로 전환되는 설치작품 ‘유리 코스모스’다. 포도뮤지엄 김희영 총괄디렉터가 기획하고 장은석(수무) 조경 건축가, 박소연 디자이너, 양유완 유리 공예가, 곽치훈 테크니션, 신재영·안록수 인터랙티브 라이팅 디자이너,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경험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만들었다.

다음 전시장은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이다. 붉은빛이 스며들고 멀리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자궁같은 공간에서 시작된 여정은 일출과 일몰, 자연과 우주를 가로지르며 쏜살같이 전개된다. 1977년 보이저 우주선에 실린 골든 레코드의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새소리, 55개 언어로 전하는 인류의 인사말 ···.
거울 속에서 나는 무한 복제되지만 동시에 점점 작아진다. 무한 확장하는 우주 앞에서 한 사람의 몸은 먼지처럼 희미해진다. 광대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존재로서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작품 ‘우리는 별의 먼지다’이다. 이 몰입형 공간 또한 김희영이 기획하고 아티스트그룹 엔에이유(Nerdy Artist Union)가 협업해 완성했다.
‘미약한 존재인 인간은 왜 서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갈까’를 고민하면서 ‘우리 모두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싹트는 이해와 연민’을 탐색한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포도뮤지엄의 특별기획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We, Such Fragile Beings)’ 얘기다. 국내외 작가 13인이 참여해 연약한 인간 존재를 위한 위로와 공감의 서사를 써나간다.

천장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거대한 철골 구조물. 건설 중인 빌딩의 골조처럼 보이거나 붕괴된 건물의 잔해처럼 느껴진다. 총 1.6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공중에 부유하는 듯, 미묘한 평온함과 위태로움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제목 ‘리메인스 투 비 신(Remains to be Seen)’은 중의적이다. ‘Remains’는 ‘남아있다’라는 동사이자 ‘유적’이라는 명사고 ‘to be seen’은 ‘앞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미래를 가리킨다. 과거의 잔해인지, 미래에 드러날 무엇일지 시제가 모호하다. 작가 모나 하툼은 현대 도시를 구성하는 산업 재료들을 낯선 방식으로 배치해 우리를 둘러싼 체계들이 얼마나 불안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드러낸다.

화면 속 파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의 시계바늘을 조립하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시간이라는 추상 개념이 인간의 손길을 거쳐 물질이 되는 순간이다. 마르텐 바스의 ‘리얼 타임 컨베이어 벨트 클락(Real Time Conveyor Belt Clock)’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 영상이다. 노동자들은 매분마다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내지만, 컨베이어 벨트 끝에 이른 시계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분해되고 만다. 노동은 끝없이 반복된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 속에서 작가는 시간에 얽매여 사는 현대인을 유머러스하게 노출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리얼 타임 XL 아티스트(Real Time XL The Artist)’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 방 크기의 육면체 구조물 안에서 작가 자신이 12시간 동안 시계바늘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관람객은 반투명 유리창 안쪽에 정말로 사람이 갇혀 있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한다. 작가는 1분 단위로 큰 바늘을 지우고 다시 그린다. 1분 사이에는 무엇인가 ‘딴 짓’을 한다.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움직임이 진짜 사람인지 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간을 가시화 하는 작업으로, 작은 시간 단위 속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인지 시간이 우리를 통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웃음에 버무려낸다.
새하얀 복도 벽면을 가득 채운 560개의 하얀 시계가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째깍거린다. 시계마다 이름, 출생 연도, 직업, 국적이 적혀 있고, 스피커에서는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직접 들려주는 인터뷰 음성이 여러 언어로 흘러나온다. 수백 개의 목소리와 시계 소리가 겹치며 몽환적인 시간의 풍경을 빚고 있다.
삶은 찰나같이 짧지만, 현재는 무겁고 느리게 흐른다. ‘사람들은 과연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해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작가 이완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미국 의사, 인도 농부, 독일 학생, 한국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노동시간과 식사비를 조사했다. 각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는 시간을 시계의 속도로 번역해낸다.

관객은 벽을 따라 걸으며 세계 각국 사람들의 서로 다른 ‘시간’을 마주한다. 빠르던 느리던 동일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뿐이다.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의미를 탐구해 온 이완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활동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김한영의 캔버스는 시간이 응축된 풍경이다. 유화 물감을 붓끝으로 찍어내, 물감 본연의 점성과 무게를 화면에 축적해 나간다. 수없이 반복된 붓질은 캔버스 위에 작은 뿔처럼 솟아오른 물감 덩어리들을 만들어낸다. 평면 회화지만 조각처럼 건축된 이 화면에서, 미미해 보이는 각각의 흔적들은 서로 지탱하며 거대한 전체를 이룬다.
그의 거듭된 붓질은 묵언수행처럼 치열하고 고요하다. 물감의 저항을 견디며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시간은 물질이 되고, 물질은 시간의 증거가 된다. 멀리서 보면 평온한 색의 흐름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미세하게 다른 각각의 터치가 만들어낸 복잡한 질감과 깊이가 나타난다.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의 시대에 그의 작업은 다른 방식의 응시를 요구한다. 직접적인 메시지 대신 보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되묻는 이 화면들 앞에서, 관객은 인내와 축적이 만들어낸 장대한 풍경을 경험한다. 오랜 시간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는 물감과 붓, 캔버스라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현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아름답게 채색된 ‘뉴욕 타임스’ 신문 36점이 질서 있게 걸려 있다. 한쪽 벽면에는 총격 사건과 전쟁, 재난과 참사의 소식들이 자리잡았고, 마주한 벽면에는 같은 날 아침의 고요한 하늘 풍경이 펼쳐진다. 관객은 액자를 넘겨 뒷면을 볼 수 있다. 채색된 앞면과 뒷면 원본 신문을 번갈아 본다. 인간사의 격렬한 소란과 평온함이 같은 24시간 안에 공존한다.

쇼 시부야는 그날의 헤드라인 뉴스와 하늘을 신문지 위에 그린다. 현실의 절망적인 혼돈 속에서 변함없이 떠오르는 해돋이는,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일상이 지닌 위로의 힘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의 소음 속에서 평온을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대통령 탄핵과 이태원 참사 등 한국 소식을 다룬 작품 네 점이 함께 걸렸다.
“사랑은 어두움을 소멸하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에너지다.(LOVE IS THE REVOLUTIONARY ENERGY THAT ANNIHILATES THE SHADOWS AND COLLAPSES THIS DISTANCE BETWEEN US.)”
포도뮤지엄 야외 공간에 LED 조명 문장이 설치됐다. 숲 속에서 빛나는 이 작품은 소리 없이 관객을 향해 말을 건다.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의 에너지라는 걸 일깨운다.

‘광고판을 시로 파괴하는 아티스트’ 로버트 몽고메리는 상업 광고판을 확보해 시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공공 공간을 바꿔왔다. 도시 소음 속에서도 사람들이 멈춰 서서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다. 그의 작품은 온라인에서 2억 회 이상 공유되며 세계인들의 치유에 실제 도움을 주고 있다.
“가끔 우주의 크기를 떠올려 본다는 것은 생각의 분모를 키우는 일”이라고 말하는 김희영 총괄디렉터는 “(우주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고민과 문제들을 초월하는 힘을 건네준다”며 작가들의 눈에서 희망의 메세지를 채집하고, 폭력에서 치유로의 변화 과정을 체험해보길 당부한다.
포도뮤지엄은 주변 환경 또한 재정비했다. 앞뜰과 뒷뜰 잔디 마당과 야외 공연장을 꾸미면서 포도호텔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산책로를 조성했다. 야외 정원에는 로버트 몽고메리, 우고 론디노네, 김홍석의 조각 작품을 놓았고 소나무 숲에는 덴마크 3인조 아티스트 수퍼플렉스의 그네를 설치할 예정이다. 2021년 개관이래 ‘혐오’, ‘소수자’, ‘노화’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면서 얻은 대중의 호응에 힘입어, ‘제주도에 가면 반드시 찾아야 할 뮤지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는 내년 8월8일까지 열린다. 화요일 휴관.
제주=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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