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챗GPT를 기점으로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AI) 기술분야가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기술(ICT) 기반의 서비스가 고도화되고 있으며 전파의 이용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전파 이용이 많아지면서 무선서비스 혼간섭 뿐만 아니라 전기·전자 장비와 무선서비스 간 상호영향을 주는 전자파장해(EMI) 현상도 많아지고 있다.
실제 RF 전구와 무선랜, PDP TV와 아마추어 무선 사이 전자파장해가 발생했으며, 의료기기에서도 다수의 전자파장해 사고가 보고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관리하는 '제조업체 및 사용자 시설 경험 보고서(MAUDE)'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전자파로 인한 의료기기 사고가 1000건 이상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전자파로 인한 장해를 최소화하고 무선서비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제 표준을 기반으로 전자파적합성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는 방송통신 기자재 등의 적합성 평가제도 종합대책 등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근거로 전자파적합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파적합성에 적용되는 국제 표준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 지상파TV 서비스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전자파장해 기준과 측정 방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자파 내성도 수십년 전의 전파 환경을 고려한 표준이다. 다양한 무선서비스와 고속 신호를 사용하는 장비들이 제한된 공간내에서 동시에 사용되는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실제 전자파 환경을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자파적합성 표준 체계가 필요하다.
현재 각국에서 적용하고 있는 전자파적합성 관리는 규칙 기반(rule-based)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단순화된 전파 환경에서 정해진 기준과 절차에 따라 적합성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규칙 기반 평가는 실제 전파 환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며, 특히 의료기기나 자율주행차와 같이 기능 안전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표준에서 정해진 방식만으로는 안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즉 전자파에 민감한 장비가 놓일 수 있는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해요소를 기존 방식만으로는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표준에 규정된 조건에서는 적합성을 확보하더라도 실제 사용 환경에서는 전자파장해가 발생하는 문제가 빈번히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위험 기반(risk-based) 전자파적합성 관리 방식이 대두되고 있다. 위험 기반 방식은 대상 장비가 실제 사용되는 곳에서의 전파 환경을 분석해 위해요소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대상 장비가 사용되는 실제 전파 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며, 얻어진 전파 환경 정보를 분석하여 장비가 안정적으로 운용되기 위한 적절한 수준에서의 전자파 방출과 내성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또 실제 환경을 반영한 측정방법이나 실제 장비가 사용되는 환경에서의 현장 측정도 필요시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위험 기반 방식의 전자파적합성 관리를 통해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를 사전에 예측하고 대응함으로써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개념정립 단계에 있는 위험 기반 방식을 국내 적합성 관리체계에 선제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전자파적합성 관점에서 전파 환경에 대한 측정과 분석, 실제 환경에서의 다양한 위해요인을 고려한 평가와 현장 측정, 그리고 위험관리 등 핵심 분야에서의 연구개발이 선행돼야 한다.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기 전 여러 경미한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하인리히 법칙을 고려하면 사전에 잠재적 위험을 파악하고 관리함으로써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전자파장해로 인한 심각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실제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해요인을 반영한 새로운 전자파적합성 평가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전파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사회 전반에 전자파 안전성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권종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한국전자파학회 정책사업 상임이사 hjkwon@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