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훌훌 훨훨’] 7일간의 동경 산책 멀리서 아름다운 후지산

2025-12-25

나리타 공항이 한산하다. 관광객으로 도쿄가 많이 번잡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관광객들이 부쩍 줄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그러했다. 어느 시골 마을 천변에 지어진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던 기억,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흩날리던 산골. 일본은 엄마와 함께 여행한 적이 여러 번 있어 부쩍 당신 생각이 많이 드는 12월이다. 매번 미루어졌던 첫 도쿄 여정을 다녀왔다. 몇 달 전 동경을 자주 다니던 지인에게 거리에 단풍이 조금 남아있는 도쿄 늦가을 날씨가 언제쯤일까 물었다. 12월 초 중순이면 딱 좋다고 했다. 항공은 프로모션 반값에 예매했고 숙소는 미리 예약해 요즘 사악하다는 호텔 경비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숙소를 어느 곳에 정할까. 예술과 문화의 도시 도쿄 여정을 계획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미술관과 박물관인데 우에노 지역이 좋을 듯했다.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우에노 공원에는 도쿄 대학과 국립서양미술관, 국립박물관, 도쿄도 미술관, 그리고 음악대학까지 여러 건축물이 모여 있다. 역사가 오래된 공원이 그러하듯 아름드리 나무들, 호수, 동물원까지 자연경관도 좋아서 산책하기도 안성맞춤이다. 쇼와 시대의 정취를 지닌 야나카 지역 숙소 에어비앤비을 구했는데 도쿄대학 미술 공부를 하는 예술가의 집이다. 한 사람만 잘 수 있는 곳은 잘 없어 숙소비를 아껴보려 시간을 많이 투자해 찾던 중 마침 적당한 가격에 나와 있었다. 집 창으로 새 카페가 보이고 토박이 현지인들이 많이 살 것 같은 골목 모습과 아담한 집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항공료과 숙박비를 좀 아끼면 여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도쿄는 지하철과 기차가 잘 되어있어 교통비는 싼 편이다.

나리타에서 우에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정취가 어찌나 시골스러운지 이곳이 세계 경제 제1국 일본의 수도 도쿄로 가는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박한 풍경이 이어진다. 오래된 낯선 역을 빠져나와 우에노 공원에 들어섰다 정말 가을이 다시 온 듯 황금빛으로 서 있는 나무들. 익숙하면서 낯선 공원 한가운데 캐리어를 끌고 혼자 서있자니 누군가 마중을 나와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문득 떠오르는 내 머릿속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페인 북부를 여행하고 있던 지인, 그녀에게 짧은 메일이 왔다고 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역에서 기다리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메시지. “너와 내가 할 수 없는 건 신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다”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뒤 삼 년이 지난 후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을 신에게 맡긴 그들은 그렇게 우연히 여행 중에 다시 만났다. ‘우연히‘라고 했지만 같은 곳을 잊지 않고 바라본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마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내가 서 있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 야나카 지역은 단정하고 옛스런 멋이 물씬 풍기며 골목이 한가롭다. 떨어진 은행잎을 하늘로 뿌리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동경의 우에노 첫날이 그렇게 갔다.

여러 여정 중에서 조금 특별했던 일정이 있었다. 긴자에 있는 100년 넘은 도쿄 가부키자 극장에서 공연을 본 것이다. 순전히 얼마 전 본 영화 <국보> 때문. 22년 만에 일본 실사영화 최고 관객 수를 갱신한 <국보>는 재일교포 3세 이상일 감독이 만들었다. 여성이 무대에 설 수 없는 가부키 공연에서 여성의 배역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를 ‘온나카와’라고 부르는데 두 주인공이 그 연기를 펼친다. 하얀 분칠을 하고 빨갛고 작은 입술을 그리는 장면, 아름다운 목과 등의 태를 유지하기 위해 피나는 수련을 해나가는 서사가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다. 혈통을 이어 가문의 가부키를 잇는 슌스케와 빼어난 아름다움과 재능을 가지고 제자로 들어온 야쿠자의 아들 키쿠오, 두 사람의 예술혼을 향한 집념과 삶, 일대기가 그려졌다. 그들이 펼치는 예술이 아름답기보다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 그 유한의 삶을 두고 치열하게 예의를 다하는 태도가 경이롭다. 연말이라서 그런가. 회한과 침잠을 오가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이 이어졌다. 이질적이고 낯선 일본의 전통 가부키에 관한 관심에 단 막을 볼 수 있는 티켓을 사서 가부키를 관람했다. 대여섯 시간 이어지는 긴 공연 쉬는 시간에 사람들은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평일이었지만 그 큰 극장이 사람들로 가득한, 전통에 진심인 일본인들의 정서가 그대로 보인다.

가부키 공연뿐 아니라 음식점도 많이 다르지 않다. 맛이란 것이 그리 디테일하게 다를 리도 없겠지만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싶은 식당과 찻집은 죄다 백 년이 넘었다. 우에노에는 삼백 년이 된 장어덮밥 식당이 있다. 어딜 가나 크지 않은 식당과 찻집에 줄을 서는 기다림의 일상에 사람들은 익숙해 있다. 한국인에게는 많은 인내를 요하는 일이다. 일주일 머무는 동안 서서히 나도 적응해가고 있었다. 동경을 너무 사랑해서 십 년을 넘게 다니며 찍은 사진으로 <東京傳> 사진집을 낸 박근태 작가와 같은 날 다른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다. 사랑스러운 여인과 여행 중인 그는 아침부터 나를 불러내 맛집 줄을 서게 했다. 라멘, 텐동, 커피. 하나 같이 영혼이 깃든 맛과 정성에 감동이 인다. 마침 도쿄도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북아트페어도 함께 다녀왔다. 한국 참가 작가들도 몇 분 참여하고 있어 더 반갑다. 빨간 기념 에코백에 수제 노트를 몇 권 샀다. 동경 여행은 왠지 번잡할 것 같아 미루어왔는데 도시 여행 중 손에 꼽을 만큼 정서가 잘 맞는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붐비지만 고요함이 있다.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시부야는 파란불이 바뀔 때 수천 명이 동시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으로 유명한 스크램블 교차로를 걷는 것으로 입성했다. 많은 인파로 멀미가 났지만 꼭 오고 싶었던 오랜된 음악 감상실과 중고 레코드를 살 수 있는 상점이 있어서 들렀다. ‘깃사 라이언’이라는 LP 음악 감상실은 백 년 동안 3대에 걸쳐서 운영되고 있는데 중심가 한 가운데 긴 시간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손님들은 음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했고 천장에서부터 대형으로 설치된 수제 스피커의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나무로 만든 이 목조건물은 삐걱거렸지만 수리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지켜가며 운영되고 있었다. 뜨거운 코코아 한 잔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917’을 듣고 나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중고 레코드 파는 곳이 있어 들렀다. 네 장에 만 원 정도 하는 저렴한 가격에 희귀한 음반들이 있어 무게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바람에 귀국할 때 고생을 좀 했다. 집에 돌아와 들어보니 중고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어 흐뭇하기 그지없다.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복잡해서 숨이 막혔던 거리 중앙에 아날로그로 남아있는 감상실의 한가롭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비가 흩뿌린 다음 날 도쿄의 마지막 여정은 기대하던 후지산 투어다. 360도 파노라마로 돌며 어느 곳에서 봐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후지산. 신사가 있는 센겐 공원과 물이 맑은 연못을 가진 오시노 핫카이, 그리고 가와구치코라는 호수를 산책하는 코스이다. 일 년에 백여 일 완전한 산 모양을 보여준다는 후지산은 일본 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이다. 오르는 일을 등산(登山)이라고 하지 않고 등배(登拜)라고 한다. 딱히 종교가 없는 일본은 자연재해로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있어 일상이 두 손을 모으는 기도이다. 신사가 도시나 마을 곳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들이 두 손을 모으는 일은 하나 더 있다. 식당이나 집에서 밥을 먹을 때 항상 가장 먼저 두 손을 모으고 “이따다끼마스”(いただきます)라고 한다. 잘 먹겠습니다. 그 말에는 ‘차려주어 고맙습니다, 귀한 쌀 지어주어 고맙습니다, 야채와 고기 생선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삿포로나 오사카, 후쿠오카 등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 느꼈던 분위기와 또 다른 기운을 이번 도쿄에서 많이 느꼈다. 분주함 속에서도 질서가 있고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빛이 나는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025년 GDP 기준 도쿄가 뉴욕을 제치고 1등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는 말이다. 서울은 런던 다음으로 5위로 올라섰다. 물론 경제적인 수치도 중요하겠지만 조화롭게 터전을 만들어 주는 다양한 인프라에 기술이 집약되며 젊은 인력들이 모이고 그에 따른 예술과 문화의 거점 도시로 만들어진다. 한 나라의 수도를 여행했던 이번 여정은 배울 것도 많았고 돌아와 추억할 일들도 가득하다.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시간, 일본 사람들은 후지산을 보면 그해에 복이 깃든다고 한다. 나는 구름 몇 조각 걸려 하얀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후지산 사진 한 장을 부적처럼 들고 다니며 만나는 이들에게 복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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