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을 빼빼로데이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사실 11월 11일은 우리 정부가 '지속가능 교통물류 발전법'에 근거해 걷기의 중요성을 확산시키기 위해 2010년 제정한 국가기념일인 '보행자의 날'이다. 이보다 훨씬 전인 1988년 유럽의회는 '보행자 권리 헌장'을 제정했다. 헌장에서 정의한 보행권은 단순히 걸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매연과 소음 등이 없는 안전하고 깨끗한 도시에서 살고 걸을 수 있는 권리라고 확대해석했다.
우리나라에서 '보행권'이라는 용어를 공식 석상에서 처음 사용한 것은 1993년 (사)녹색교통운동, 행정자치부 등이 함께한 시민 캠페인 때였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보행권 회복 운동은 매우 성공적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중 하나가 1997년 서울시가 제정한 보행권 조례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장은 서울시민의 보행권 증진을 위해 5년마다 서울시 보행환경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그로 인해 나타난 열매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서울시청 앞 광장, 덕수궁 돌담길, 광화문 보행공원, 청계천 복원, 7017도로 등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많은 지방 도시들도 전에는 노상주차장으로 사용하던 복개하천을 복원해 시민들이 걷고 자전거를 타는 보행 복지 공간으로 바꿨다. 이전에는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던 구도심에 보행자 천국이 조성된 곳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보행사고 사망자 수도 2018년 1487명에서 2023년 886명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특히 수십년 동안 마의 벽처럼 깨지지 않던 보행사고 사망자 비율 40%가 2020년부터는 34%대로 감소하기 시작했다(물론 이 비율은 OECD 회원국 평균 19%에 비교하면 형편없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다. 첫 번째는 운전자 의식 수준이다. 2022년 5월 20일부터 보·차도가 구분되지 않고 중앙선이 없는 이면도로에서는 차보다 보행자가 우선 통행할 수 있도록 도로교통법이 개정됐음에도 아직도 운전자의 머릿 속엔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이란 인식이 강한 것 같다. 횡단보도에서 자동차는 보행자를 먼저 건네주거나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서는 보행자 유무와 상관없이 무신호 횡단보도 앞에서는 자동차가 일시 정지해야 함에도 이것을 지키는 운전자는 별로 없다.
두 번째는 고령 보행자 사망사고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 3년간(2020~2022년) 연령대별 보행 사망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2년 보행 사망자 933명 중 노인이 558명으로 59.8%를 차지했다. 국내 노인 비율이 18%인 것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의 노인 10만명당 보행 사망자 수는 7.7명(2020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중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1.9명)의 4배, 꼴찌에서 두 번째인 리투아니아(4.2명)의 두 배쯤 된다. 또한 노인 보행 사망자 중 무단횡단 사망자가 34%나 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는 아직 미진한 법조문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교통인프라를 보행자 친화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방향 보행신호등 같은 것이 추천된다. 세 번째는 안전교육 강화다. 이를 위해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한 교통안전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예컨대 운전자들에겐 VR 교육을 통해 골목길에서 속도에 따라 어떻게 치명적인 사고와 조우할 수 있는지 경험케 해줄 수 있다. 고령자의 경우에는 VR 교육을 통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자신의 실제 신체 능력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그것이 어떻게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주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년 우리나라는 시민단체와 학연관산 및 언론이 힘을 합해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보행권을 신장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이를 위해서는 11월 11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보행자의 날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장원 한국교통대 교수·유라시아교통연구소장 jlovewk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