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금융위기 데자뷔? 그때와는 달라

2025-11-21

글로벌 최약체 통화 전락한 원화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400원 중반대를 넘나들며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환율은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과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일부에서는 1500원 돌파를 점치거나 외환위기 당시의 불안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이번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을 위기의 전조로 보기는 어렵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환율이 급등한 것은 당시 한국경제가 단기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해외 시장에서 달러화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외국인 자금이 갑자기 빠져나가고 단기 외화자금의 만기 연장이 막히면서 국내 외화 유동성이 고갈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즉, 위기가 ‘높은 환율’이 아닌 ‘달러 부족’에서 발생한 것이다. 오히려 크게 오른 환율은 수출 증가, 외국인 자금 복귀 등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의 고환율은 달러 부족이나 금융 불안의 결과가 아니라, 지난 10여년간 축적된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환율은 경제의 종합 성적표이자 신호이기 때문에, 단기적 움직임보다는 그 이면의 구조적 변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화가 과거보다 크게 비싸졌다. 이는 미국 경제의 구조적 우위에서 비롯된다. 2010년 이후 미국은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정보기술(IT),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에서 미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를 선도했고, 자본시장은 풍부한 유동성과 혁신적 금융 인프라를 통해 투자자금을 끌어들였다.

미국 증시는 지난 10여년간 연평균 두 자릿수 수익률을 기록하며 세계 자금을 끌어들였다. 반면 유럽, 일본, 중국 등 여타국은 낮은 성장과 인구 고령화, 구조개혁 지연으로 생산성이 정체됐다. 그 결과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미국의 비중은 2010년 40%대에서 최근 약 65%로 상승했다. 이러한 미국의 장기 호황은 달러화의 구조적 강세를 이끄는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다.

국제 환경도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은 정치적 불안과 경기침체 우려로 유로화 약세가 지속하고, 일본은 새 내각 출범 이후에도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며 엔화도 약세 흐름을 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인플레이션 반등 위험으로 금리 인하를 늦추며 통화완화 기조로의 전환을 주저하고 있다.

한국은 생산성 둔화와 투자수익률 하락에 직면해 있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000년대 중반 5% 수준에서 2010년대에는 2%대로, 최근에는 1%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제조업 중심의 성장모델이 한계에 이르고, 서비스업은 생산성 제고에 실패했다. 기업의 수익성은 둔화했고, 저축은 늘었지만 국내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2010년 이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맞물려 연금·보험 중심의 장기저축이 많이 증가했는데, 이 자금이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로 이동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비중은 2005년 10%대에서 올해에는 57.1%(5월 기준)에 이르고, 보험사와 개인 투자자의 해외투자 규모도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이렇게 형성된 ‘저축의 해외 유출 구조’는 원화 가치를 끌어내린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미 간 금리 차 역전으로도 나타난다. 2022년 이후 미국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1.5%포인트 이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는 현재 4%에 이르지만, 한국은 2.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금리 차는 외국인 자금의 국내 유입을 제한하고, 오히려 달러 자산으로의 이동을 촉진한다. 금리 역전이 장기화하면서 원화는 자연스러운 약세 압력을 받게 되었고, 기업과 개인 투자자들은 원화 자산보다 달러 자산을 더 선호한다.

이에 더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 강화, 보호무역 조치,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요구는 기업들에 달러화 확보 부담을 주고 있다. 그 결과 달러당 원화값은 1450원선을 넘어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위기 상황은 아니지만, 구조적 불균형 위에 시장의 불안 심리가 더해진 결과다.

고환율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수출기업에는 채산성 개선과 가격 경쟁력 향상의 효과가 있고 경기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지난 외환위기 이후 그랬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생산성이 낮은 상태에서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이는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이 국내 투자로 연결되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굳어지면,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일본식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지나친 불안 심리에 의한 쏠림 현상이 발생할 경우 시장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원화 약세를 만들어 내는 구조를 바꾸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외환시장 구조를 선진화해 기업과 금융기관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불필요하게 변동성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 역시 고환율을 이익 기회로만 보지 말고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원화 약세로 인한 추가 수익을 구조조정과 기술혁신 투자에 활용해야 한다. 과거 2000년대 초 일부 기업이 고환율을 이용해 무리한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가 이후 환율 급락으로 큰 손실을 본 사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 이익을 연구개발과 신사업 투자, 재무구조 개선 등 미래 경쟁력 강화에 활용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기업의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세제 혜택, 정책금융 지원, 자본시장 개혁 등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원화 약세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 위기의 트라우마에 갇히어 환율 상승을 두려워하고 이에 단기 대응하기보다는, 생산성과 투자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제 체질을 바꾸는 근본적 해법에 집중해야 한다. 달러 강세와 글로벌 자본 이동이라는 외부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체력을 다지는 일, 그것이 진정한 환율 안정의 길이다.

이승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은행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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