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정책에 혼란스러운 수요자

2024-10-31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당시 취임 7개월째였던 이명박 대통령은 여당인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의 조찬 회동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임기 중에 무주택자를 없애겠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무주택자에게 억지로 집을 배정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당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주택 공급 대책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전했다. 무주택 서민의 ‘내 집 마련’을 도울 수 있게 저렴한 가격의 보금자리주택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전청약 당첨 취소에 피해 속출

‘디딤돌의 배신’ 대출 축소도 논란

정부 믿다가 ‘바보’ 되진 않게 해야

정책 방향은 주택 공급 확대로 잡았는데 문제는 속도였다. 정부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각종 인허가 절차까지 마친 뒤 공사에 들어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명박 정부는 ‘사전예약’이란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일반 아파트 선분양보다도 1~2년 앞서 신청을 받아 예약을 걸어두는 방식이었다. 무주택자에게 당장 집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몇 년간 참고 기다리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이었다.

당시 주택정책을 총괄했던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사전예약 제도를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강에는 물이 넘쳐 흐르고』)에서 “주변 시세의 70~80% 선으로 사전예약 방식의 청약 제도를 도입하자 신혼부부들의 청약 열기가 뜨거웠고 반값 아파트라고 불리며 빠른 시간에 히트 상품이 됐다”고 적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1990년대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주택 공급 확대로 집값을 안정시킨 역대 두 번째 대통령이 됐다.

시계를 다시 현재로 돌려보자. 지난 9월 26일 경기도 파주의 운정중앙공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십 명이 ‘사전청약 사기 청약’ ‘당첨 지위 승계하라’ 같은 구호가 적힌 쪽지를 들고 거리 집회에 나섰다. 2년 전 파주 운정신도시에서 주상복합 아파트 사전청약에서 당첨됐다가 사업 중단으로 당첨 취소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도입했던 사전예약은 박근혜 정부에서 폐지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사전청약이란 이름으로 되살렸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폐지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은 뜻하지 않은 피해자를 낳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사전청약 당첨 취소로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빼앗긴 이들이다. 올해 들어 사전청약이 취소된 곳은 일곱 개 단지, 약 3100가구에 이른다.

이제라도 정부가 피해자 구제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건 다행스럽다. 지난달 24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의 발언이 주목된다. 이날 맹성규 국토교통위원장은 “피해자들은 취소된 사업지에서 사업이 재개되면 사전당첨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요구한다. 국토부가 전향적으로 검토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 장관은 “기본적으로 공공청약 프로세스에 들어와서 청약을 받은 것”이라며 “공공에서 신뢰 보호 차원에서 그런 입장을 갖고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박 장관의 검토 발언이 ‘립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조속히 확정 발표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맹 위원장의 말대로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른 국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이 수요자에게 혼란을 안겨준 건 이뿐이 아니다. 최근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선 디딤돌 대출을 둘러싼 혼선이 있었다. 디딤돌 대출은 주택도시기금에서 최저 2%대 금리로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 자금을 빌려주는 상품이다. 그런데 정부가 어느 날 갑자기 대출 한도를 줄이겠다고 나서면서 난리가 났다. 시장에선 ‘디딤돌의 배신’이란 말까지 나왔다.

정부의 설명대로 가계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나지 않게 관리할 필요성은 인정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충분한 사전 예고로 대출 수요자들이 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더구나 무주택 서민의 내 집 마련을 지원하는 정책대출 상품이 대상이었다.

공교롭게도 정부가 올해 30조원에 이르는 ‘세수 펑크’를 메우기 위해 주택기금 등에서 돈을 갖다 쓰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논란이 더 커졌다. 정부는 내년에 이 돈을 갚겠다고 설명하지만 어쨌든 올해는 주택기금의 여윳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주택기금의 대출 여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정부는 세수 펑크 때문에 대출을 조이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대출 수요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결국 박상우 장관은 국회에서 “국민들에게 혼선과 불편을 드려 매우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말로만 사과에 그쳐선 안 된다.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정부 정책이 더 이상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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