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김 흰 옷, 회색 됐다…압구정 초짜 세탁소의 참사

2024-07-15

‘한번 팔고 나가면 현생에선 못 돌아오는 곳’. 서울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칭하는 표현이다. 1976년 지어져 낡았지만 자타 공인 ‘국내 1타’. 과거부터 정·관계 고위직, 기업 회장, 연예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이 많이 산다. 욕망의 종착지 같은 이곳에 외부인은 잘 모르는 재래시장이 있다. 국내 아파트 상가의 시초로 꼽히는 신사시장의 50년 추억을 들춰본다.

군 제대 후 스물둘. 고향 충주를 떠나 상경했다. 가진 건 어깨너머로 배운 세탁 기술뿐. 강남 은마아파트, 여의도 삼부아파트 주변 세탁소에서 일을 배웠다. 눈이 뜨일 무렵 압구정 현대아파트 안 시장에 빈 가게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12평 공간. 6평이 1칸인데, 두 가게를 튼 곳이었다. 월세도 부담이었지만 부자 동네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고민 끝에 ‘호랑이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1985년 세탁소를 열었다. 큰 호텔에서나 쓰던 3000만원짜리 수입산 세탁 기계를 빚을 내 들였다. 지금으로 치면 1억원가량의 거금. 일반 세탁소로선 파격이었다. 이 정도는 갖춰야 부촌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세련된 복장의 손님이 가게 문을 열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 의상실에서 왔다고 했다. 의상실에 전시하던 흰색 투피스 여덟 벌. 실크 소재라 먼지가 잘 붙어 고객에게 건네기 전 드라이클리닝을 요청했다.

알고 보니 앙드레김 의상실이 근처 신사동에 있었다. 앙드레김 집도 현대아파트 11동. “오길 잘했네.”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참사가 벌어졌다. 세탁기에서 뺀 옷이 죄다 회색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한 벌 값만 200만원. 여덟 벌이니 1600만원으로, 지금이라면 6000만원가량. 물어주려면 가게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밤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앙드레김을 찾아갔다.

“제가 아직 경험이 없어 사고가 났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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