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명산대찰을 찾은 이들은 절 입구 마당에 놓인 기와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절의 지붕을 얹기 위한 기와들인데, 불자들은 이름과 소원을 적어 보시를 올린다.
가장 많은 소원은 ‘가족의 건강과 화목’이다. 단순하지만 삶의 본질이 담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다. 그다음으로는 자녀의 취업과 결혼을 기원하는 글이 많다. “손주를 안아볼 수 있게 해주세요” “투자한 곳에서 꼭 대박 나게 해주세요” 같은 소원도 보인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취업, 결혼, 출생의 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타깝고 씁쓸한 현실이다.
수능이 다가오면 전국 사찰에는 수험생을 위한 백일기도 현수막이 걸리고, 스님들의 목탁 소리도 분주해진다. 어떤 절에는 ‘수능 고득점 기원’이라는 문구까지 등장한다. ‘부모 찬스’로 부족해 이제는 ‘부처님 찬스’에 기대는 부모들의 마음은 절절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입시철 풍경은 우리 교육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수능 고득점, 명문대 진학, 정규직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쟁의 사슬이 숨 막히고, 그 이면에는 주입식 교육과 선다형 시험에 지친 아이들의 좌절이 있다. 이들은 서열화된 대학 체제에서 탈락한 뒤 취준생과 비정규직으로 밀려나 삶의 기본조차 꾸리기 힘든 현실과 마주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자격증을 따고 능력과 열정을 갖추고도 취업 문턱을 넘기 어려운가. 왜 창업은 어렵고 민생은 늘 고단한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데 왜 국민은 생계의 기본조차 불안한가. 이는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맹자>의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이 떠오른다. 안정된 생계 기반이 있어야 인간의 존엄도 지켜진다.
지난해 12월3일부터 올해 6월3일까지, 우리는 어둡고 긴 고행을 함께 견뎠다. 대통령 선거로 혼란은 일부 수습됐지만 이제는 ‘진짜’ 나라를 만드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 다행히 국민은 가슴 따뜻하고, 머리 냉철하며, 손발 부지런한 지도자를 선택했다. 그는 민생을 ‘먹사니즘’이라 표현하며 모두가 품격 있게 살아가는 ‘잘사니즘’을 이야기했다. 그 진심에 신뢰를 보내면서도, 민생이 단기 처방에 그치지는 않을지 우려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대한다. 새 대통령이 ‘재조산하(再造山河)’의 철학으로 이 나라의 뿌리와 방향을 바로 세우기를. 지금 시대정신은 부분적 회복이 아닌, 삶의 방향을 바꾸는 ‘혁명’이다.
그 혁명의 출발점은 ‘교육’이어야 한다. 진심으로 고민하고 연구하며, 지혜로운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지도자야말로 진정한 정치인이다. 역대 훌륭한 정치가들은 집무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를 새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은 교육이 단순한 제도를 넘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근본 문제임을 짚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가 ‘극단적 경쟁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겉보기엔 공정해 보이지만, 그 속엔 타인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능력주의가 숨어 있다. 세계 최고 우울증 비율, 최저 출생률, 최고 갈등지수, 최고 고립률은 모두 이 경쟁 구조의 결과물이다.
불법 비상계엄 이후 우리는 검찰, 법원, 국회, 행정부, 언론, 종교 등 각 영역에서 파워 엘리트의 파시즘적 행태를 똑똑히 목격했다. 김 교수는 그 근본 원인을 경쟁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찾고, 한국을 학벌계급사회라 진단한다. 교실은 우월감과 열등감을 내면화시키면서 모두가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자만심이 깃든 아이도, 열패감을 품은 아이도 결코 깨어 있는 건강한 시민으로 자랄 수 없다.
새 대통령의 첫 과제는 내란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일이겠지만, 더 절박한 과제는 모든 영역에서의 ‘사고의 대전환’이다. 출발점은 교육 혁명이 돼야 하며, 이 책이 그 실마리가 되리라 믿는다.
부디 재임 5년 동안 재조산하의 기틀을 굳건히 다져주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