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영국군이 미국 수도 워싱턴을 점령하고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을 붙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독립국으로 인정을 받은지 30여년 만의 일이었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은 둘도 없는 동맹이지만, 미국 독립 이후 수십년간 두 나라 관계는 무척 나빴다. 1812년 무역 갈등에서 비롯한 양국의 전쟁이 미국에선 ‘제2의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당시는 미국과 바로 붙어 있는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이다. 자연히 미국 공격에 투입된 영국군 병력 대부분이 캐나다 출신이었다. 워싱턴과 백악관을 빼앗긴 수모에 대해 오늘날 미국인들은 ‘캐나다가 아니고 영국에 진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캐나다인들은 ‘우린 세계 최강 미국 수도를 점령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국민’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 자치령이던 캐나다는 영국을 도와 참전했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군대는 처음에는 캐나다군을 무시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무너뜨리지 못한 독일군 방어선에서 캐나다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돌파에 성공하자 캐나다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는 한층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탈환을 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총 5곳의 지점에서 연합군의 상륙이 이뤄졌다. 2곳은 미군, 2곳은 영국군이 각각 맡았고 나머지 1곳이 캐나다 몫이었다. 상륙 후 불과 15분 만에 캐나다군은 해안가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어 다른 곳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영국군과 대치하던 독일군의 후방을 기습해 섬멸했다.
군사 강대국으로서 캐나다의 면모는 6·25 전쟁 당시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51년 4월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을 막아낸 가평 전투가 대표적이다. 캐나다군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중공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히며 가평 677고지를 사수한 것은 ‘6·25 전쟁의 전세를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캐나다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이를 기념해 오늘날 677고지에는 ‘캐나다하우스’(Cananda House)라는 이름의 한국식 정자가 조성돼 있다. 2023년 5월 한국을 방문한 쥐스탱 트뤼도 당시 캐나다 총리는 한국 청년들과 함께 캐나다하우스에 올랐다. 그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캐나다의 공헌은 영웅적이었다”며 “그 이후 우리 두 나라는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제니 캐리냥 캐나다 국방참모총장(육군 대장)이 5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캐나다 역사상 첫 여성 국방참모총장인 그는 6·25 전사자 명비를 찾아 헌화한 뒤 거수경례로 참전용사들을 기렸다. 캐나다는 전쟁 기간 미국,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2만6700여명의 장병을 한국에 보냈으며 그중 516명이 전투 도중 목숨을 잃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이 이 점을 들어 감사의 뜻을 표하자 캐리냥 참모총장은 “캐나다와 한국은 오랜 시간 우정과 아픈 역사를 공유한 나라”라고 화답했다. 이어 “전사자 명비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캐나다처럼 강력하고 용맹한 군대를 보유한 나라가 한국과 함께한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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