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예요? 사과해요, 나한테

2024-12-21

[경향신문] “제가 입은 정신적인 충격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를 받고 싶어요.”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잖아요. 사과받아야죠.”

“시험 기간인데 마음 편히 공부하지 못하고 추운 길거리에서 시위하게 만든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과받고 싶습니다.”

맨몸으로 무장군인과 맞서고 강추위 속에서 국회 앞을 지켰다. 그리고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훼손된 민주주의를 구해낸 주역은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응당 비상계엄 사태 책임자인 대통령의 사과부터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지난 12월 14일 주간경향은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시민 192명에게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계엄 사태 이후 어떤 고통과 피해를 겪었는지’ 물었다. 답변자 대다수는 사과를 요구하며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불안, 불면, 분노, 스트레스, 집중력 저하 등을 꼽았다.

물론 윤 대통령에게 사과를 기대하긴 힘들다. 그는 “(계엄이)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고 강변하며 헌법재판 ‘셀프 변론’까지 예고했다. 탄핵과 내란죄 처벌이 확정되지 않은 지금, 사과는 한가로운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과는 사과대로 받아야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510명은 지난 12월 12일 낸 성명에서 시민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헌법에 명시된 절차에 의한 (대통령) 직무 정지 또는 사퇴”와 “현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죄”다.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길 원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설문과 인터뷰로 모았다. 이 주제는 탄핵 촉구 집회에 등장한 어느 깃발의 문구 “사과해요 나한테”에서 얻었다.

■잠을 못 잤다

지난 12월 3일 10시 30분,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 대학생 홍예린씨(24)는 잠자리에 누워 X(옛 트위터)를 보고 있었다. 오보인 줄 알았던 계엄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될 때 즈음 소셜미디어(SNS)에서 ‘국회로 와 달라’는 누군가의 호소를 봤다.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두려움이 충돌했지만 결국 집을 나섰다. “스스로 용기를 주고 싶어서” 혼잣말을 되뇌기도 했다. “이건 역사에 남을 거야.” 국회 앞에 도착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시민의 행렬을 마주한 그때, 헬기 소리가 들려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머리 위로 군 헬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올여름 다녀온 광주의 전일빌딩이 떠올랐다. 44년 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탄흔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어쩌면 우리를 쏠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정말 쐈으니까….’ 헬기 소리를 들으며 홍씨가 했던 생각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때 제가 정신적 공황 상태였더라고요. 계엄 해제에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내일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되면 엄마에게 알려달라’면서 친구들에게 엄마 연락처를 주고 국회로 갔더라고요. 그걸 까먹고 있다가 친구가 알려줘서 생각해냈어요.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거죠.”

그날 이후 홍씨는 헬기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라는 증상을 겪고 있다. 노점상에서 가스 불을 켜는 소리, 카페 창문에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식이었다. 그는 설문에 이렇게 답했다. “계엄 이후 생활패턴이 망가지고 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울과 감정 기복도 심해졌고, 과각성과 번아웃(소진)을 오갑니다. 진짜 정신적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군인과 대면하지 않았던 시민들도 심리적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12월 14일 부산에서 출발해 여의도 집회에 참여한 조모씨(32)는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불안과 불면을 꼽았다. 그는 비상계엄을 접하고 “뉴스 댓글 등 인터넷 여기저기에 윤석열과 김건희 욕을 많이 남겨놓았다는 사실부터 생각났다”고 했다. “‘어디론가 끌려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무서워지더라고요.” 계엄은 해제됐지만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2차 계엄 가능성을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뉴스를 계속 확인하며 밤을 지새웠다. “한동안 우울증약을 안 먹고 있었는데,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병원에 갔죠.”

‘불안’, ‘잠을 못 잤다’ 등은 계엄 사태 이후 어떤 피해와 고통이 있었는지를 묻는 설문 답변에서도 가장 많이 나온 표현이다(그림 1).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장면이 생생해 잠을 설친다” “또다시 계엄을 내릴까, 북침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으로 잠을 자기 힘들었다” 등의 답변이 대표적이다.

‘강박적 뉴스 확인’과 ‘집중력 저하’가 힘들었다고 응답한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수시로 무슨 문제가 벌어지진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기사를 찾아봤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라 꼴이 이런데 과제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에 과제를 놓아버렸다. 기말 시험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 답변이 이어졌다. “집회 나오느라 마감 맞추려면 밤샘 작업해야 한다”고 답한 웹소설 작가, “계엄령이 선포된 12월 3일 10시 30분부터 16일까지 매장 문 닫고 탄핵을 외치며 길거리 노숙을 했다”는 자영업자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평화로운 일상의 토대였다”

계엄 이후의 심리적 고통을 털어놓은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평화로운 일상을 떠받친 토대였음을 새삼 알게 됐다”고도 했다. 많은 응답자가 민주주의 훼손과 자신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연결 지었다.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어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 “민주주의가 파괴된 것만으로도 정신적 피해”, “민주주의를 잃을까 두려움”, “민주주의가 눈앞에서 위태로운 것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등의 답변이 줄줄이 이어졌다.

대통령에게 사과받고 싶은 이유로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지난 12월 14일 두 딸과 함께 여의도를 찾은 김경아씨(48)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기초학력지원사업 예산 삭감을 언급했다. 기초학력 지원 사업은 학습이 더딘 청소년들에게 별도의 수업을 제공하는 제도로, 올해 예산이 50% 이상 삭감됐다. 지난해까지 중학교에서 기초학력 교사로 일했다는 김씨는 “소외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주로 이 수업을 듣게 된다”면서 “형편이 여의치 않은 친구들이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밖에 도서관 예산과 연구개발(R&D) 예산 등의 삭감, 물가 상승, 채 상병 사건 수사 방해, 친일 외교, 부자 감세, 노동 탄압, 전쟁 위기, 반복적인 거부권 행사 등도 ‘대통령에게 사과받고 싶은 이유’로 꼽혔다. “인간적인 삶의 본질적인 파괴가 진행된 임기였으며 그 정점을 찍은 것이 12·3 비상계엄”이라고 평가한 시민도 있었다.

“사과는 필요 없다”며 “사면 없는 무기징역” 등 강력한 처벌만을 주문한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간의 윤 대통령 언행으로 미루어 진정한 사과는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계엄 사태 이후 윤 대통령은 두 차례 담화에서 “사과”를 언급했지만 허울뿐이었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으로서의 절박함에서 비롯됐다”(12월 3일), “마지막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12월 12일)면서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과해요 나한테.”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나부낀 어느 깃발 문구는 많은 이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민주주의 유린으로 시민의 마음은 찢겼는데, 내란 수괴 피의자는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을 유쾌하게 비튼 것이다. 시민들은 해학과 웃음으로써 ‘사과받지 못한 마음’을 치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시민은 윤 대통령에게 어떤 사과를 받고 싶은지를 묻는 말에 이렇게 일갈했다. “공자가 길 한가운데에서 용변을 보는 자는 가르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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