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 바둑은 안 된다

2025-12-17

바둑돌 하나가 어두운 바둑통에서 나와 바둑판에 놓인다. 그 돌은 네 군데 출구가 모두 막히면 죽는다. 죽음은 삶에 비해 쉽고 간단하다. 바둑에 입문하면 ‘축’을 배운다. 축은 죽음의 사자다. 일단 축에 몰리면 헤어날 방도가 없다. 축을 알면 18급이다.

바둑돌의 삶은 죽음에 비해 복잡하다. ‘두 집을 내면 산다’는 게 기본이지만 오궁도화·매화육궁 등 5, 6집을 내고도 죽는 아름다운 이름들이 존재한다.

호쾌하지만 무모한 바보짓

살의 바둑, 정치권에 넘쳐나

고수들은 살의 바둑 두지 않아

바둑돌은 삶이 완성되기까지 미생(未生)의 형태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진영을 구축하고 군단을 형성한다. 상대의 공격에 맞서고 타개하며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이 많은 인기를 모은 적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완생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삶, 특히 젊은이의 삶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삶과 죽음은 바둑판 위의 일상사다. 바둑기사들은 정교한 외과의사처럼 바둑돌의 생사를 다룬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준비된 바둑기사들도 여간해서 ‘살(殺)의 바둑’은 두지 않는다. 살의 바둑이란 필살의 바둑을 말한다. 상대의 돌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거나 이득을 취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음으로 이끌겠다는 극단의 바둑을 말한다. 살의 바둑은 호쾌하다. 승리의 지름길이고 승리의 쾌감도 극대화된다. 하나 고수일수록 살의 바둑에 고개를 젓는다. 살의 바둑은 성공확률이 낮고 후유증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권은 살의 바둑이 난무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 네거리마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기 어린 구호가 걸려있고 국회에서는 불퇴전의 의지를 되새기는 강공 일변도의 독설들이 넘쳐난다.

현 세계 최고수 신진서 9단은 어려서부터 매일 사활문제를 풀었다. 더 높은 수준의 난해한 사활문제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렇게 준비되고 단련된 신진서조차 실전에서 살의 바둑은 거의 두지 않는다. 신진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바둑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살의 바둑이 연일 펼쳐지는 국회의 아수라장이 불안하고 무모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살의 바둑은 가끔 수상전을 동반한다. 수상전이란 죽음이라는 골라인을 정해두고 서로 한 수씩 메워 수가 짧은 쪽이 죽는 것을 말한다. 목숨을 건 싸움 끝에 누군가 한쪽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모습은 전혀 고수답지 않다. 둘 중 하나는 조만간 닥칠 죽음조차 예상하지 못했으니 고수라 부르기 민망하다. 수상전은 고수의 바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전투방식이고 하수 놀이라 할 만하다. 하나 정치권에선 이런 수상전이 매일 벌어진다. 내란재판에 얽힌 양측의 대결도 일단 수상전 양상이다. 내란이냐, 아니냐. 누군가 한쪽이 패배하겠지만 끝까지 가본다.

대마를 향한 살의 바둑은 무모의 극치라 할만하다. 대마는 아마존 강처럼 길어서 거의 죽은 듯해도 어딘가에서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인간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없다. 대마를 잡았다고 큰소리치다가 조용히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후회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마불사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완벽하다는 AI조차 대마의 생사를 놓고서는 오엑스(OX)가 아닌 확률로 대답한다. 한데 국회에서는 대마잡이에 나서는 법안들이 줄줄이 예고되고 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마를 잡겠다는 사람에게 그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에게 퇴로를 열어주라고 권하고 싶다. 병법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마는 진정 불사의 존재인가. 아니다. 대마도 종종 죽는다. 그러나 대마는 누가 잡으러 와서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는다. 형세가 너무 곤궁해지면 스스로 포기하고 죽음의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상대를 죽이겠다고 강공을 펼치는 것은 바둑에 비춰보면 바보짓이다. ‘사활을 건다’고 난리를 치는 것 역시 허망한 바보짓이다. 그런데 바보가 아닌 그들이 왜 바보짓을 하는 걸까. 이 점이 진정 놀랍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바둑판 밖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 극렬한 신념으로 뭉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 그들은 매일 살의 바둑을 두어야 마땅하다고 외치고 있고 정치권은 여기에 화답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닮아가고 있고 비극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

그 비극의 연장선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 있다. 그는 살의 바둑 예찬론자였다고 여겨진다. 계엄령을 통해 골칫거리들을 일망타진하려다 감옥에 갔고 재판을 받고 있다. 본인이 그만 축에 몰리고 말았다.

그의 행적은 권력자일수록 살의 바둑은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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