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에 팔린 007…제임스 본드는 죽었다

2025-02-27

007은 영국의 문화 팬터지 상품

수컷 본능 자극…남성관객 열광

매각 소식에 충격과 실망 고조

"영국적 색채 유지 어려울것"…팬들 기대 접어

마구잡이 스핀오프, 마블 히어로 변질 등 우려

2005년 영국 축구의 자존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미국의 글레이저 가문에 넘어가자 성난 영국 축구 팬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소유주인 말콤 글레이저의 꼭두각시로 화형식도 했다. 당시 BBC는 “축구경기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한 건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영국인들의 상처 난 자존심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20년 뒤인 지금, 그에 필적할만한 일이 또 일어났다. 영국 대중문화의 상징이며 자존심인 007 제임스 본드의 창작권이 미국 아마존으로 넘어간 것이다. 지난주 나온 이 뉴스에 영국인들은 충격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휩싸였다. 영국인들은 아마존이 본드의 영국색을 굳이 지켜줄 거라 믿지 않는다.

007시리즈는 60년 전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사 EON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전세계를 열광시키면서 영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비틀스와 함께 영국 대중문화의 양대 아이콘이었다.

25편의 모든 작품에는 영국색이 짙게 배어 있다. 본드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영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또 영국 해외정보국 MI6 소속 국가공무원으로서 영국에 대한 본드의 충성심이 은연중에 깔렸다.

여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정체성도 숨어 있다. 여성들이 세련되고 섹시한 본드를 넋 놓고 바라보는 동안, 영국의 남성들은 본드를 통해 제국주의의 화려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본드 시리즈는 영국이 세계 제1의 국가임을 과시하며 영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영국인들이 제임스 본드의 영국성에 집착하는 이유다.

문화적 측면에서 본드는 ‘우아한 영국’의 상징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그냥 첩보원이 아니다. 용모, 스타일, 매너, 개성, 취향, 이 모두가 뭇 남성의 동경 대상이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남성 패션잡지에 멋쟁이 ‘본드 스타일’이 소개되곤 했다.

탄력 있는 근육과 섬세한 실루엣을 동시에 갖춘 핸섬한 용모에 박학다식한 두뇌, 그리고 스포츠 만능인데다 귀족적 매너와 화술을 겸비했다. 입맛 까다로운 소믈리에급 미식가이자 패션 스타일도 완벽하다. 주변엔 늘 슈퍼모델 명함 내밀 법한 미녀들이 차고 넘친다.

새 시리즈마다 등장하는 기발한 자동차와 첨단무기들은 거의 SF 수준이다. 그에게 주어지는 임무 역시 초우주급 황당무계 그 자체다. 툭하면 감방 가거나, 재판 불려나가는 우리 국정원 공무원과는 노는 물이 다르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는 현실 첩보물이 아니라 남성용 팬터지다. 관객들은 그걸 알면서도 스크린에 빠져든다. 그게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매력이다.

독특한 어투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자기소개할 때도 꼭 이렇게 폼을 잡는다.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요.” 마티니를 주문할 때도 유난을 떤다. “흔들어서, 젓지 말고(Shaken, not stirred).” 흔들어 만들건, 저어 만들건, 그 차이를 알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 그런 사소한 취향 역시 본드의 매력이 됐다. 이게 유행하자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생화학과에선 흔들어 만든 마티니와 저어 만든 마티니의 차이를 분석했다. 본드의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수컷 본능을 자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007 시리즈의 음악 '본드 뮤직' 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영국의 존 배리 등을 비롯해 전설적 작곡가들이 만든 주제가는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히트송 리스트에 올랐다. 셜리 배시, 낸시 시내트라, 폴 맥카트니, 칼 사이먼, 시나 이스턴, 티나 터너, 마돈나, 아델 …

또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건배럴 시퀀스의 테마는 007 시리즈의 시그너쳐가 됐다. 딩디디딩딩 딩딩딩 … 이 팽팽한 멜로디에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던 사내들,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이런 게 본드라는 존재에 온통 뭉뚱그려져 영국적 체취로 소비돼왔다.

본드 시리즈는 2021년 ‘노 타임 투 다이’ 이후 답보 상태에 있다. 본드가 영국 해군 미사일에 맞아 충격적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팬들은 EON이 그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존의 인수는 본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던 영국팬들에게 본드의 죽음 이상의 충격을 안겨줬다. ‘영국적인 본드’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이제 세인의 관심은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티머시 돌턴, 피어스 브로스넌, 대니얼 크레이그에 이어 누가 차기 제임스 본드가 될 것인가에 쏠려 있다. 그간 차기 본드로 물망에 오르던 이드리스 엘바, 톰 하디, 헨리 카빌, 킬리언 머피와 같은 A급 영국 배우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대신 유대계 영국 배우 아론 테일러 존슨이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언론은 성급히 ‘최초의 유대인 007’ 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극렬 팬들은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본드 시리즈 제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이미 1975년 시작됐다. 브로콜리가의 제작 파트너 해리 살츠만이 자신의 권리 절반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매각하면서다. 1995년 ‘골든 아이’부터는 EON 창업주의 딸 바바라 브로콜리와 의붓아들 루이스 윌슨이 운영해왔지만, 자금 조달과 배급을 위해 대기업 파트너에 의존해야 했다.

007 프랜차이즈의 제작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브로콜리와 윌슨은 갈수록 방대해지는 엄청난 예산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자, 결국 미국 자본과 손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한 매체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돈’이 건네졌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아마존이 제임스 본드의 영국적 색채를 유지할지가 주요 관심사다. 얼마 전 브로콜리는 차기 본드 하마평이 나돌자 “어떤 피부색이든 남자, 그리고 영국인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브로콜리는 협상 과정에서 007시리즈를 ‘콘텐츠’라고 부르는 아마존 측에 격노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영국색을 유지하려는 EON 측의 정서적 언어와 이윤 추구에 비중을 둔 아마존의 기업적 언어는 지속적으로 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존이 영화사상 가장 사랑받는 시리즈 중 하나인 007의 창작권을 인수한 이유는 간단하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EON 시대에 벌었던 액수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아마존은 많은 것을 시도할 것이다. 본드의 주변인물을 활용한 스핀오프, 프리퀄, 리메이크 등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제임스 본드가 마블 시리즈에서 나오는 슈퍼 히어로쯤으로 변질되진 않을까, 하는 점이다.

기업 자본이 프랜차이즈를 사들여 실패한 사례들도 많다. ‘스타워즈’의 제작자 조지 루카스는 2012년 소유권을 디즈니에 40억 달러에 매각했다. 이후 13년 동안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지만 결국 지루한 프랜차이즈로 전락했다. 루카스 없는 ‘스타워즈’처럼 EON 없는 007을 걱정하는 시각이 많다.

지금은 관객 형성 구조상 제임스 본드라는 영웅 하나만으로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다. 디즈니는 지난해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로 1억 3400만 달러를 손해봤다. 영국색 짙은 제임스 본드에 익숙해 있는 영화팬들은 아마존의 미국식 007에 즉각적으로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존의 자금력과 창작 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누가 차기 본드가 될 것인가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은 영국 대중문화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영국성이 사라진 제임스 본드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제임스 본드 역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아마존은 차기 본드를 여자 배우로 캐스팅할지도 모른다. 물론 돈에 끌려가는 프랜차이즈의 실태를 비꼰 말이었겠지만.

영국인들에게 EON없는 제임스 본드는, 알렉스 퍼거슨 없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도 같다. 회사명 EON이 ‘Everything Or Nothing’의 약자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영화에서 창작은 Everything이 아닌가?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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