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질주로 연구비와 인재가 특정 분야로 빠르게 몰리고 있다. 2025년 정부 주요 연구개발(R&D)은 24.8조원까지 확대됐고(배분·조정안 기준), 기초연구는 2.94조원으로 역대 최대다. 같은 해 정부는 3대 게임체인저(AI·바이오·양자)에 3.4조원을 투입하는 구상을 제시했고, 혁신·도전형 R&D에 1조원 투자를 천명했다. 방향성은 타당하지만, 한쪽으로의 과도한 집중은 파급효과의 실물 전환을 더디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필요한 것은 속도의 경쟁을 '구성의 경쟁'으로 바꾸는 포트폴리오 설계다.
포트폴리오 하한 규칙이 필요하다. 국가 R&D를 △기초·원천 △플랫폼(AI·SW·데이터·장비) △응용·현장(소재·부품·공정·안전·환경)의 세 축으로 나누고, 각 축의 최소 비중(하한선)을 제도화 할 것을 제안한다. 예컨대 단기적으로 기초≥15%·플랫폼≥30%·응용≥30%, 중·장기적으로 기초 분야를 20%까지 단계적으로 상향할 수 있다. 배분은 기존 사업의 급격한 감액이 아니라 증액분 우선 배분원칙으로 보정해서 첨단분야 집중의 속도와 산업 생태계 균형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한다.
하한 규칙의 과학기술적 근거는 분명하다. 기초-플랫폼-응용은 대체 불가능한 상보성으로 연결돼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과 반도체 같은 플랫폼 기술은 수학·물리·재료·알고리즘(기초)의 누적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고, 표준·시험·스케일업·안전·환경(응용)이 받쳐주지 않으면 현장 적용이 늦어진다. 세 축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임계치 아래로 내려가면 전체 성과 함수가 둔화되는 '동시 병목'이 나타난다. 하한 규칙은 이 임계선 밑으로의 추락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장치다.
수치로도 하한의 실효성을 보일 수 있다. 현재 총액 24.8조원에서 기초(2.94조원)의 비중은 약 12% 수준이다. 단기 하한 15%만 적용해도 필요한 추가 배분은 24.8조 × (0.15-0.12) = 0.744조원(약 7440억원)이다. 이는 연간 총지출 증가분(예:3% 내외)을 활용하면 1~2개 연도 안에 흡수 가능한 규모다. 다시 말해, 플랫폼·응용의 절대액을 깎지 않고도 구조 보정이 가능하다. 반대로 게임체인저(3.4조원)와 혁신·도전형 R&D(1조원)는 플랫폼/엔진 축의 추진력을 보여준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응용의 최저선을 보장해 '지식창출→실증→표준→거래'로 이어지는 가치사슬을 동시에 끌어올려야 한다.
부처 사업의 신설·통폐합때는 사전 포트폴리오 영향평가를 의무화해 세 축 비중 변화를 진단하고, 하한 미달 시 보정계획 없이는 상정 불가로 만드는 제도 개혁도 필요하다. 또 3년 주기 리밸런싱으로 유행·경기발 쏠림을 완충하며, 어느 한 축이 전년 대비 -3%P 이상 하락하면 차년도 배분·조정에서 최우선 보정 트리거가 자동 작동하도록 설계한다. 집행·성과 관리는 TRL 5~8 실증 투자비중, 표준·시험평가·안전·환경 집행률, 공정개선·불량·에너지·사고율같은 현장지표를 핵심 계량지표로 삼아 대시보드로 투명하게 공개해 운영을 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하한 규칙은 측정될 때 비로소 작동한다. 그래서 대시보드는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라 책임의 회계장부여야 한다. 세 축 비중과 변동폭, 실증 투자비중, 표준·안전 지표, 현장 성과(불량·에너지·사고율)까지 한눈에 보여주자. 국민과 산업이 같은 데이터를 보며 토론할 때 정책의 신뢰와 예산의 효율은 함께 상승한다.
핵심은 간명하다. 첨단 분야에의 투자 가속은 필요조건이지만, 과학기술 시스템의 구성 균형은 충분조건이다. 하한 규칙은 '빨리'가 아니라 '올바른 비율로' 성장하기 위한 과학적 안전판일 뿐 아니라, 예산이 증감하는 국면에서도 자동으로 작동하는 규율이며, 특정 분야의 기술·시장 실패가 국가 혁신체계를 흔들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적 보험이다. 국민이 확인 가능한 포트폴리오 대시보드와 결합될 때 정책의 책임성과 신뢰가 높아지고, 24.8조 원의 투자가 지식창출-실증-표준-거래로 이어지는 전주기 성과로 축적되고, 한국의 R&D는 유행의 파고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성장 궤적을 갖게 될 것이다.
왕제필 국립부경대학교 교수 jeipil.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