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대법원이 ‘여성’의 법적 정의를 생물학적 성(sex)에 한정한다고 판시하면서, 엘리트 스포츠부터 생활체육까지 전 영역에서 트랜스젠더 선수들의 참여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전망된다. BBC는 “법원이 ‘성은 이분법적 개념이며, 여성으로 성별 인정을 받은 트랜스젠더도 법적 의미의 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이는 스포츠계에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대법원은 17일(현지시간) “여성의 정의는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한다”고 판결했다. 젠더 인식 증명서(GRC)를 통해 여성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트랜스젠더도 생물학적 성이 남성일 경우 법적 ‘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의료, 피난처, 스포츠 클럽 등 단일 성별로 구성된 공간은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 법적 보호를 받게 됐다. 영국 정부는 “이 결정은 여성에게 명확성과 신뢰를 제공한다”며 “단일 성별 공간은 법으로 보호되며 앞으로도 정부가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판결이 엘리트 스포츠에 곧바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종목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부 출전을 금지하거나,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다. 육상, 수영, 사이클 등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출전을 전면 금지했다. 2022년 영국 트라이애슬론협회는 세계 최초로 트랜스젠더가 참가할 수 있는 ‘오픈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영국축구협회(FA)는 이달 초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기준으로 출전 여부를 판단하는 규정을 강화했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부 출전 자체는 여전히 가능하다. 등록된 트랜스젠더 여성 아마추어 선수는 잉글랜드 전역에 20명에 불과하며, 홈네이션 내 프로 리그에는 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종목별로 포용과 공정성 사이의 균형을 각 연맹이 판단하도록 맡기고 있다. 대표적 사례인 트랜스젠더 역도선수 로렐 허버드는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출전했지만, 이후 논쟁은 더욱 격화됐다.
이번 판결은 구속력이 강한 명령은 아니지만, 향후 스포츠 규제 기준이 될 수 있는 ‘법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실제로 2023년 영국사이클연맹은 트랜스젠더 여성 사이클리스트 에밀리 브리지스의 출전을 제한했고, 이에 따라 여성 카테고리 출전 자체를 막는 결정을 내렸다. 영국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샤론 데이비스는 이번 판결에 대해 “10년을 싸워 얻은 정의”라며 “여성이란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면 공정한 스포츠는 성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여성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해선 안 된다. 이제는 FA와 잉글랜드 크리켓보드(ECB)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트랜스젠더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이번 판결은 차별을 부추기고, 트랜스젠더 선수들이 스포츠 참여에서 배제당할 우려를 높인다”고 반발했다.
영국에서는 생활체육 분야가 오히려 갈등의 최전선이 되는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규제 장벽이 낮고, 참여자 간 교류가 활발한 지역 단위 경기들에서는 판결의 영향력이 더욱 직접적이다. 실제로 2024년, 공공 달리기 프로그램인 파크런(Parkrun)은 여성부 기록에서 트랜스젠더 참가자 정보를 전면 삭제했다. 여성 운동가들은 “엘리트는 보호됐지만, 생활체육과 유소년, 여성 레크리에이션 영역은 무방비 상태였다”며 “이제야 정의가 내려졌다”고 반겼다. 반면, 일부 트랜스젠더 여성은 “이번 판결로 인해 스포츠에 참여할 용기를 잃었다. 단지 운동을 하러 나왔을 뿐인데 혐오와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스포츠 관련 혐오 발언과 물리적 위협은 법적·제도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급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BBC는 “‘여성’의 법적 정의가 확정되면서, 이제 스포츠계는 더 이상 모호함 뒤에 숨을 수 없다”며 “누가 출전할 수 있는가를 넘어서, 누구를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BBC는 이어 “여성 선수의 권리와 트랜스젠더 선수의 존재권은 충돌이 아닌 조율의 대상이 됐다”며 “그리고 이 조율은 앞으로 스포츠 규범을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의 과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