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기만 하면 결례 논란이 불거지고 청와대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그런 정상 간 관계는 또 처음 봤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1기 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이야기다.
2018년 5월 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만났다. 그런데 회담 시작 전 트럼프는 문 대통령을 옆에 앉혀둔 채 36분간 기자들의 질문을 28개나 받았다. 대부분은 미국 국내 정치 현안이었고, 정상 간 대화가 아니라서 한국어 통역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달 중 첫 한·미 정상회담
문 정부 때는 결례 논란 반복
안보 의제 등 치밀한 대비를
마지막에야 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미국과 긴밀하게 공조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트럼프는 “저 말은 분명 전에도 했던 이야기일 테니 통역할 필요 없다”며 일방적으로 회견을 끝내버렸다.
2019년 4월에는 부부가 함께 당했다. 회담에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가 배석했는데, 트럼프는 문 대통령 부부를 옆에 앉혀놓고 질문을 14개 받으며 또 마이크를 독점했다.
2019년 9월 유엔에서 두 정상이 만났을 때도 트럼프는 기자들과 17차례 문답을 주고받으며 혼자 답변을 독식했다. 문 대통령이 받은 질문까지 가로챘다.
이달 중 열릴 이재명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일화가 떠오르는 건 기우가 아니다.
트럼프는 사람에 대한 인상을 좀처럼 바꾸지 않고, 보고서도 한두 페이지만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를 ‘친구’로 여긴 덕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빠른 정상회담 등 적어도 출발선상에서는 호의적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그는 문 전 대통령에 대해선 “약한 지도자”라며 “배은망덕(ungrateful)하다”고 비난했다(2021년 4월 e메일 성명). 트럼프가 이 대통령을 처음 만날 때 이런 잔상이 어른거릴 수 있다.
이에 더해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로 일컬어지는 트럼프와 가까운 강경 보수 인사들이 한국 대선이나 이 대통령의 외교 노선에 의구심을 공개적으로 표출해 온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관세 협상 타결이 곧 평탄한 정상회담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정부는 쌀과 소고기 추가 개방을 막은 걸 최대 성과로 내세우는데, 미국은 “한국이 미국산 쌀 등에 대한 역사적 시장 접근을 제공했다”(지난달 31일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고 하는 건 뒷맛이 깨끗하지 않다. 트럼프가 SNS에 정상회담 시 한국이 추가로 약속한 “큰 액수의 투자” 규모를 공개할 것이라고 예고한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정부가 의도했던 통상-안보 연계 ‘패키지 딜’ 협상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서 ‘안보 청구서’는 이제 시작이다.
당장 미국이 제기해 온 ‘동맹의 현대화’가 정상회담 테이블에 오르게 됐다. 이는 중국의 위협 증강 등 변화한 현 안보 환경에 맞게 동맹 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개념으로, 주한미군의 역할이나 규모 변경 등을 수반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트럼프는 이 대통령에게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한·미 동맹으로 거듭날 것이냐’는 직설적 질문을 할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 정치외교 분야의 거물이었던 애버럴 해리먼 전 미 국무부 차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정상급 회담은 언제나 정중하다(courteous). 욕설(name calling)은 외교장관들의 몫이다.” 실무선에서는 치열하게 다투되 정상끼리는 서로 격을 갖춰 대우하는 정상회담의 필연적 속성을 짚은 발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예외다. 이미 피해자가 속출한다. 생중계로 겁박당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영상까지 동원한 가짜뉴스로 ‘매복’당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이 다음 순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한다면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은 전혀 정중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