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문연구원이 창립 50여 년 만에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AI 천문학자’ 에이전트(비서)를 도입하는 등 본격적인 AI 전환을 추진한다. 정보기술(IT) 대기업들처럼 AI 연산 인프라와 업무 솔루션을 자체적으로 갖춤으로써 우주 관측 데이터 분석과 연구개발(R&D) 역량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빅테크까지 가세하며 천문 우주 분야로 AI 경쟁이 확대되는 ‘스페이스 AI’ 시대에 대응해 국내 전담 연구기관도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이다.

이재준 천문연 AI·첨단컴퓨팅센터장은 12일 “GPU 기반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관측 데이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 허브’ 사업을 기획 중”이라며 “2027년부터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우선 내년에 실증 시스템 운영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의 ‘AI 포 사이언스(과학을 위한 AI)’ 정책에 맞춰 천문학 가설과 천체 관측 계획을 세우고 분석까지 도와주는 박사급 에이전트인 AI 천문학자도 도입할 예정”이라고 했다.
‘자율 망원경 프로젝트’도 추진된다. 천체 종류마다 광학·적외선·전파 등 잘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이 다른 데다 당일 날씨와 관측 시간대에 따라서도 최적화 조건이 달라진다. 이 센터장은 “세계 주요 망원경들은 하루 운영비만 수억 원이 든다”며 “이를 빌리는 연구자들은 관측 확률과 데이터 품질을 최대한 높일 조건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율 망원경은 현실을 모사한 가상공간 디지털 트윈에서 조건들을 시뮬레이션해 수많은 망원경 운용을 최적화해주는 AI다.
천문연은 AI 분석 역량으로 관측 데이터 폭증에 대응할 방침이다. 한국천문학회에 따르면 천문연이 운영하는 외계행성탐색시스템(KMTNet)과 국제 협력 중인 칠레 베라루빈천문대 ‘차세대시공간탐사관측(LSST)’, 14개국 공동 ‘국제거대전파망원경(SKA)’ 등 관측 시스템 11개에 필요한 데이터 저장 용량은 올해까지 누적 5.19PB(페타바이트·1000조 바이트), 2034년에는 120.2PB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가동을 시작한 베라루빈천문대 한 곳만 매일 데이터 1000만 건, 20TB(테라바이트·1조 바이트)를 만들어내며 전 세계적으로도 천문학 분야의 AI 수요가 커지고 있지만 실제 기술 도입은 아직 초기 단계다. 관측 데이터는 많지만 전파·감마선·중력파 신호처럼 일상에서는 낯선 비정형 데이터가 많고 초신성 폭발이나 블랙홀 같은 주요 천체 현상은 희귀해서 AI가 패턴을 학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빅테크들은 신기술을 선보이며 학계의 수요 선점에 나섰다.
구글은 지난달 데이터셋 수십 건만으로 대규모언어모델(LLM) ‘제미나이’가 초신성과 변광성 같은 주요 현상을 93% 정확도로 구별해내도록 만든 연구 성과를 ‘네이처 천문학’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세 관측 기관으로부터 데이터셋을 각각 15건씩 얻어 제미나이에 입력했다. 데이터셋은 주요 현상이 발견되기 전후 이미지와 그 차이를 알려주는 이미지 등 총 3장과 각종 분류 지침들을 담았다. 제미나이는 이를 통해 새로운 천체 신호 수천 개를 분류해냈다. AI 모델이 이미지 수백만 장을 직접 학습하는 대신 훨씬 적은 수의 예제(example)만 풀어보고도 더 많은 문제를 풀 수 있게 만드는 ‘퓨샷러닝’ 기술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메피스토’는 제임스웹우주망원경(JWST)이 관측한 고(高)적색편이 은하의 질량을 포함한 특성을 기존 천문학자들 수준으로 분석해낸다. 적색편이는 우주 팽창으로 인해 멀리서 오는 빛이 왜곡되는 현상으로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빛일수록 심하게 나타난다. 고적색편이 은하는 통상 100억 광년 이상 떨어져 적색편이가 매우 심한 은하다. 그만큼 관측과 분석이 어렵지만 AI로 극복할 길이 열린 것이다.
또 IBM과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은 8월 태양 활동 예측 모델 ‘수리야’를 공개했다. 수리야는 9년 치 NASA 데이터를 학습해 위성항법시스템(GPS)과 전력·통신망 교란을 일으키는 태양 플레어를 기존 1시간보다 이른 2시간 전에 예측한다. 기존의 물리 기반 예측 모델은 계산량이 많고 예보 속도가 느렸지만 수리야는 AI를 이용해 관측 이미지에서 전조 신호를 자동 탐지함으로써 우주 날씨를 더 빠르고 정밀하게 예측하는 혁신적인 시도다. 중국 국가천문대는 올 4월 천문학 특화 LLM ‘아스트로원’을 공개했다.
인공위성 탐사에도 AI 도입이 활발하다. 관건은 경량화다. 한재흥 한국과학기술원(KAIST) 우주연구원장은 “인공위성에 AI를 탑재하려면 한정된 전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동시에 지구와 통신이 어려워 (중앙 서버 없이) 위성에 탑재된 온보드(내장형) 모델이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KAIST 우주연구원은 이를 극복할 ‘능동 제어 위성’을 개발하고 있다. 우주공간에서 우주쓰레기처럼 너무 작아 육안으로 보기 어려운 물체와 그 움직임을 자율주행차 센서처럼 AI가 식별해주는 기술이 핵심이다. NASA는 7월 ‘다이내믹 타기팅’을 실제 위성에 탑재했다. 지상 관측을 방해하는 구름을 위성 스스로 전방 500㎞까지 식별하고 관측 방향을 돌려 이를 피하는 기술이다. NASA는 산불 등 이상 현상을 위성이 선제적으로 찾아 관측하는 자율 위성 기술로 고도화할 방침이다. 중국은 위성 2800개로 우주공간에 슈퍼컴퓨터급 AI 연산 인프라를 구축하는 ‘삼체 연산 위성군’ 계획을 추진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