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게요, 변희수 하사님

2025-05-14

4월18일에 인천공항을 떠나 현지시간으로 같은 날인 4월18일에 미국 시애틀에 도착해 ‘필립 K 딕’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4월19일에 출국해 4월20일에 한국에 돌아왔다.

상은 못 탔다. 역시나 “불발”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불발 전문 작가’가 된 것에 별로 불만은 없다.

나는 최종 후보자 낭독회에서 단편 <그녀를 만나다>의 마지막 부분, “변희수 하사님을 기억합니다”라는 문장을 큰 소리로 읽기 위해 거기까지 갔다. 한국어판에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영어판에는 안톤 허 번역가가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트랜스젠더 군인’이라는 설명을 넣어 번역했다.

나는 변희수 하사님의 이름과 함께 그 부분도 읽고 싶었다.

변희수 하사님이 얼마나 용감하고 멋진 분이었으며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한국 군대와 국방부와 경직된 차별주의적 관점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잊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세계만방에 알리고 싶었다.

사실 ‘세계만방’에 알리기에 필립 K 딕상 시상식은 참으로 소박한 행사였다. 필립 K 딕상은 필라델피아 SF협회에서 주관하는데, 시상식은 시애틀의 노웨스콘(Norwescon)이라는 SF대회에서 열린다.

주관 단체와 시상식 개최 행사가 다른 이유는 필립 K 딕상의 시상식이 다른 주요 SF 상들의 시상식과 겹치지 않게 하려는 단순한 의도였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SF협회가 봄에 열리는 노웨스콘에 시상식 자리를 빌렸다가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계속 노웨스콘에서 시상식을 거행하고 있다.

노웨스콘은 1978년 처음 개최되었으니 거의 50년의 역사를 가진 행사다. 가서 보니 예상대로 SF와 환상문학을 사랑하는 괴짜들의 모임이었다. 다들 (거의 대부분 스스로 제작한) ‘최애’ 의상을 입고 ‘최애’ 작품의 ‘굿즈’를 사 모으며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즐기고 있었다.

괴짜와 팬들의 자발적인 모임이기 때문에 미국의 이런 SF대회들은 오래됐더라도 결코 부유하지는 않다. 필립 K 딕상 후보들은 초대를 받긴 받는데 항공권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숙박은 4월18일, 그러니까 시상식 날 하룻밤만 제공받는다. (그래서 내가 하루만 지내고 돌아온 것이다. 환율도 비싼데 계속 뭉갤 수는 없었다.)

시상식을 위해 탄핵광장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부스에서 받은 트랜스젠더 깃발 삼색 머리띠, 세종호텔지부 허지희 동지에게 졸라서 빼앗은(?) 민주노총 서울본부 제작 무지개 머리띠, 3월8일 여성의날에 받은 민주노총 여성의날 보라색 머리띠를 가지고 갔다.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여성인 변희수 하사님을 상징하고 싶었다.

띠가 잘 보이게 하려고 옷은 까만색으로 입었다. 띠가 좀 많아서 머리에 다 두르기는 곤란해 목에 둘렀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리본 멋있다”고 칭찬해주었다.

필립 K 딕상 시상식은 동영상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돼 한국에서도 많이들 시청하신 모양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내가 목에 하늘색-분홍색-흰색 트랜스젠더 띠, 무지개 띠, 보라색 띠를 주렁주렁 걸고 낭독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혹은 스크린 캡처 사진으로 보았다며 기뻐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일하시는 활동가님이 “저 무지개 머리띠 내가 만들었다”며 자랑스러워하셨다는 얘기를 다른 인권단체 활동가님에게 전해 듣고 무척 감사했다.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해 아직까지 ‘준비위원회’로 남아 있다. 변희수재단은 트랜스젠더 청년들에게 우선은 경제 지원,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가지 지원을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적극 지원은 못할망정 어째서 설립 허가도 안 내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도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런다고 인간의 다양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각성하라.

오는 5월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이다. 때마침 토요일이라 여러 관련 행사들이 열릴 것이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

아쉽게도 나는 이날 폴란드에 있을 예정이다. 바르샤바 국제도서전 올해 주빈국이 한국이라 여러 작가님들과 함께 참여한다. 대신 바르샤바 퀴어박물관을 방문할 것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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