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머무름의 이유를 묻다

2025-12-02

밤공기가 부쩍 차고 건조해졌다. 늦은 밤, 마른기침에 잠이 깨기 일쑤다. 그렇게 자주 깨는 밤이면 간혹 불안해져서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제는 육신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걸 느낄 만큼 중노릇도 꽤 오래 했나 보다’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며칠 전 30년 이상의 출가자에게 주는 조계종단의 ‘법계(法階)’를 품서 받았다. 그날따라 겨울을 독촉하듯 찬비가 새벽부터 내려서인지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더 시리게 느껴졌다. 처음 삭발하던 날도 찬바람에 머리가 시렸는데, 30년이 넘도록 내 두피는 아직도 적응을 못 하는 모양이다.

주마등처럼 흘러간 출가 30년

덧없는 꿈 같고 후회도 남지만

미완성에서 완성의 희망 싹터

시간에 맞춰 조계사 법당에 도착해 맨 앞에 자리 잡았다. 장궤합장(長跪合掌·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합장한 자세)을 하고 이런저런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3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스친 것은 못나고 초라했던 젊은 시절이었다. 젊은 날의 나는 그리 아둔하진 않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굽힐 줄 몰랐으며 자주 오만했다. 겸손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걸 나이를 한참 먹고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겸손이 최고의 미덕임을 느즈막에야 알게 된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후회가 밀려와서인지, 뭔지 모를 설움 같은 게 순식간에 밀물처럼 전신으로 퍼져 들어왔다. 그나마 마지막 순서로 기존의 가사를 벗고 새로운 가사를 받아 왼쪽 어깨에 걸칠 때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큰스님들께서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지만, 생뚱맞게도 나는 앞으론 더없이 가볍고 자유롭게 살리라 다짐했다.

법계 품서식이 있던 그 날은 동분서주하며 종일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과거를 떠돌며 헤매고 있었다. 마치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 사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몹쓸 과거들만 골라 회상하면서 계속 후회할 일들을 찾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출가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오직 수행과 자비행만으로 채워졌더라면 더없이 좋았으련만, 그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고, 어떤 날엔 약속을 어겼으며, 어떤 때는 며칠씩 내 안의 굴속에 들어앉아 숨어 지냈다. 물론 열심히 수행 정진하던 때도 있었고, 전법에 힘쓰며 선한 일도 꽤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게 덧없고 꿈같은 시간일 뿐이었다.

아무튼 잘했든 못했든, 지나간 그 모든 행위가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만은 틀림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내 것이고, 행복한 순간도 내 삶의 기쁨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며 살아가긴 해도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연기처럼 쉽게 사라진다. 심지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 이틀 지나면 잊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모든 삶은 서툴다』(이문필 편역)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달콤하고 강렬했던 기쁨의 순간이 오래도록 감동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쁨의 순간은 마치 생명이란 긴 강줄기에 띄엄띄엄 떠 있는 조각배처럼 가끔 찾아올 뿐만 아니라 너무나 짧아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도 나는 향로에 꽂힌 향처럼 쉼 없이 타들어 가듯 살아간다. 금방 사라지는 기쁨과 행복도 자주 느끼면서 말이다. 어쩌면 삶은 그 짧은 순간들을 붙잡으려 애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기쁨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순간들이 모여 내 하루를 빛나게 하지는 않았을까. 불완전하고 서툰 걸음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을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돌아보면, 삶은 그 짧은 기쁨을 오래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불완전한 하루가 쌓여 결국 나를 이루듯, 덧없음 속에서 더 환히 드러나는 빛이 있지 않은가. 그 빛은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사라진 자리마다 작은 흔적을 남겨 내 마음을 천천히 적신다. 나는 그 흔적을 따라 걸으며,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완전함 대신 서툶에서 의미를 배우고 있다.

출가자의 삶은 생각보다 더 불안정하고, 때로는 허무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수행자의 삶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나를 멈추게 하고, 멈춤으로써 더 깊이 울리며, 다시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짧은 기쁨이 사라진 뒤에도 여운은 오래 남아 내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바로 그 미완성의 자리에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깃든다. 또한 그 증거가 오늘을 다시 희망으로 이끈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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