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재난 가족 지원법

2024-12-31

1996년 7월, 미국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프랑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트랜스월드항공 800편이 이륙 12분 만에 공중분해돼 탑승자 230명이 전원 사망했다. 사고 원인은 중앙 연료탱크 폭발이다. 4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 사고 후 미국에서는 ‘항공 재난 가족 지원법’이 제정됐다.

항공 사고는 대규모 인명 피해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추락 원인 파악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뉴스 등을 통해 추락 영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희생자 신원 확인과 사고 원인 조사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와중에도 언론사·보험사 등의 연락에 시달린다. 이들이 겪는 사고 후유증과 트라우마는 항공 사고의 직접적 피해자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한다.

지원법은 이들의 트라우마를 최소화하기 위한 여러 지원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다. 교통당국과 항공사는 희생자 명단 공개 전 반드시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유족과의 원활한 소통을 도울 비영리 독립기관을 지정하고, 사망자 신원 확인 후 가족에게 이를 알릴 제3자를 임명한다. 조사 현황 브리핑과 무료 상담 전화 제공은 물론, 유족들이 외부 방해 없이 애도할 시간을 갖도록 사고 현장 근처 호텔 등에 안전한 공간을 마련한다. 심리 상담과 추모식 준비를 도울 전문가도 대기시킨다.

2013년 미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착륙 사고를 낸 아시아나항공은 사고 다음날까지 무료 상담 전화번호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사고 대처 훈련을 받은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 법에 의거해 50만달러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은 괌 공항 사고와 세월호·이태원 참사 등 대형 참사를 겪고도, 여전히 희생자 가족 지원에 서투르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다음날 오전에도 시신 수습·검안부터 신원 확인까지 유가족 안내를 전담하는 이 하나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시신이 부패할까 애가 타는데 시신 안치용 냉동컨테이너 설치도 약속보다 늦어졌다.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참사 원인 조사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탑승자를 지키지 못했던 우리 사회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가족들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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