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바이오 산업 전반이 글로벌 경기 둔화와 기술 밸류에이션 하락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하지만 위기 속에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분야가 있다. 바로 '바이오 빅데이터'다. 지금까지 의료 및 정밀의료 분야 중심으로 다뤄졌던 바이오 빅데이터는 이제 식품, 뷰티, 보험, 농업, 정보통신기술(ICT) 등 다양한 일반 산업 분야에서 활용될 준비가 돼 있다.
바이오 빅데이터란 유전체, 장내미생물, 임상 정보, 생활 습관, 환경 요인 등 생명 현상과 관련된 다양한 데이터를 대규모로 수집하고 통합한 정보를 의미한다. 이 데이터가 산업계에 융합될 때, 우리가 익숙한 제품과 서비스는 한층 더 정밀하고 개인화되며, 나아가 건강 중심의 소비로 변화하게 된다.
한국은 유전체 분석 기술, 국민건강보험 기반 임상데이터, 마이크로바이옴 연구 인프라 등 세계적으로 드문 복합 역량을 갖춘 나라다. 이를 잘 구조화하고 활용한다면 디지털헬스, 정밀영양, 스마트보험, 글로벌 실사용근거(RWE) 연구 등의 분야에서 데이터 수출형 산업모델을 만들 수 있다.
현재 정부는 100만명 규모의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사업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민간의 유전체·마이크로바이옴 진단 기술이 결합되면, 한국형 정밀의료 플랫폼을 MENA(중동), ASEAN(동남아) 지역의 국가 프로젝트로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비전 2030' 전략과 연계한 디지털 헬스케어 통합 플랫폼 구축, 동남아 국가의 여성 건강관리 앱과 마이크로바이옴 DTC 진단 서비스 결합 모델 등이 현실적인 수출 대상이다. 이미 국내 여러 기업들이 해외 병원 및 정부 기관과 공동 연구 또는 플랫폼 라이선싱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바이오 빅데이터는 의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식품 산업에서는 개인의 유전체·장내미생물 정보를 활용한 정밀영양 식단 및 기능성 소재 개발, 뷰티 산업에서는 피부 유전자 기반 맞춤형 화장품, 보험 산업에서는 질병 위험도 기반 맞춤 보험료 모델 등으로 확장 가능하다.
식품 산업은 바이오 빅데이터의 가장 즉각적인 수혜 분야다. 개인의 유전형이나 장내미생물 군집을 분석해 '당신에게 맞는 단백질' '염증 억제에 효과적인 오메가-3'처럼 맞춤형 식단을 제안하는 서비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이는 기존 대중영양학 기반에서 벗어나 소비자의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한 정밀영양 정착을 뜻한다. 헬스케어 푸드 브랜드들은 유전체 기반 연구개발(R&D)을 통해 기능성 소재와 조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며, 향후 K바이오푸드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
국내 화장품 기업들도 바이오 빅데이터에 주목하고 있다. 피부 유전자나 마이크로바이옴 분석을 기반으로 개인별 스킨케어 솔루션을 제안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며, 화장품 성분의 효과를 정량화하는 데에도 생물학적 데이터가 활용된다. 피부염, 여드름, 노화 민감도를 진단하고 사전 예방하는 화장품 제품들과 기술 및 서비스들을 준비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도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또 고품질의 유전체-임상-생활정보를 통합한 한국의 데이터셋은 다국적 제약사들과의 RWE 공동 연구에 있어도 매력적이다. 새로운 바이오마커 발굴, 동아시아 인종군 대상의 반응 예측모델 개발, 맞춤형 임상시험 설계 등 다양한 협력이 가능하다. 향후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 분석 API나 임상보조 알고리즘은 '소프트웨어형 의료기기(SaMD)'로도 활용될 수 있다.
바이오 빅데이터는 보험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핵심 변수다. 고객의 유전자와 건강 데이터를 기반으로 질병 위험도를 산정하고, 이에 따라 보험료를 책정하거나 리워드를 제공하는 '정밀 보험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또 기업용 건강관리 서비스에서 유전체 기반 웰니스 솔루션이 확산되면 직장인의 건강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새로운 B2B 헬스 모델도 형성될 수 있다.
농업 및 스마트팜 산업에서도 바이오 빅데이터의 활용 가능성은 크다. 예를 들어 당 대사를 조절하는 특정 유전형 고객에게 적합한 기능성 쌀, 장내 미생물 개선 효과가 높은 채소 품종 등 개인 유전정보와 매칭되는 고기능 농산물 생산이 가능해진다. 이로써 고부가가치 농산물의 수출 및 프리미엄 시장 공략도 현실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바이오 빅데이터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선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과 기업의 실행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가명정보 활용 범위 확대, 해외 인증(CFDA, CE 등) 지원, 산업화 연계 컨소시엄 지원 등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또 데이터를 비즈니스 언어로 전환할 수 있는 '데이터 기획형 인재' 양성도 중요하다. 단순 분석을 넘어 어떤 산업에 어떤 구조로 데이터를 적용할지 기획하고 패키징할 수 있는 역량이 시장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K콘텐츠, K뷰티에 이어 지금은 'K바이오 데이터'가 글로벌 시장을 이끌 수 있는 기회의 장에 서 있다. 한국이 가진 고품질 바이오 데이터, 정밀 분석 기술, 디지털 헬스 문화를 융합해 수출 가능한 플랫폼으로 만들 수 있다면 K바이오는 다시금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다.
박준형 쓰리빅스 대표·부산대 의대 겸임교수 jhpark@3bigs.com
〈필자〉부산대에서 생물정보학협동과정을 졸업했다. 일찍부터 바이오와 IT를 결합한 생물정보학 연구에 매진해 제약사, 병원 등과 바이오 빅데이터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바이오 기업 인실리코젠에서 본부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유전자 분석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2015년부터 2년간 테라젠이텍스 생물정보부 이사직을 수행했다. 2018년 쓰리빅스를 설립해 바이오 빅데이터 플랫폼, AI 기반 신약 개발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아시아 종묘, 화장품 신소재, 신약 개발 등 다양한 영역에서 IT와 BT를 접목하는데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