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턴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능력이 생겼다. 어쩌면 병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쪽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원고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한쪽 귀로는 영어 공부를 다른 한쪽 귀로는 유튜브로 소설을 듣기도 한다. 혼자 있어도 고독할 틈이 없다. 문득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인상적인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인간 실존을 고독하게 그려낸 그 책의 제목이 마치 현대의 오늘을 예언한 것도 같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도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며 갖가지 삶의 무늬를 구경하는 습관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러니 꿈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혼자여도 고독할 틈 없는 세상
지나 보니 삶은 시시함의 연속
뻔한 말들 속에 다정한 위로가

며칠 전 꿈속에선 어느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 내가 의자에 앉으니 한참 젊은 기자가 나보고 앉지 말고 서 있으라 한다. 내가 젊은 사람이 어른에게 너무 예의가 없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책상 위의 가위를 내게 던진다. 다음 순간 그가 영화 속의 가위 손이 되어 마구 수 없는 가위들을 던진다. 나는 살려달라고 온 힘을 다해 빌다가 꿈에서 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유튜브에서 이삼 백 년 전에 세상 떠난 현자들이 생전에 남긴 말들을 읽어 준다. 나는 이 말들이 참 위로가 된다. 인생은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오늘 즐겁게 나아가는 항해라든지, 인간은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죽음이 더 두렵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거라든지, 혹은 죽음은 했어야 하는 모든 일이 다 끝나는 것이라는 식의 말들이 마치 얼굴 한 번 못 본,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삼촌의 말을 듣는 기분처럼 다정하게 들린다.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낙은 수면이었다. 추운 겨울 두꺼운 이불을 덮고 꿈나라로 가는 일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 두꺼운 옛날 솜이불의 무게는 차가운 밤의 갑옷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아주 푹 잠들어 깨지 않는 일이 뭐 그리 나쁘랴.
그런데 왜 죽는 일이 나이 들수록 두려워지는 걸까? 언젠가 백 살의 은사님이 한 5년만 더 살고 싶다 하셨다. 그리고 5년 더 사셨다. 스승님께 가장 배우고 싶던 게 바로 그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울적한 나의 병을 다스리며 아마 나도 그렇게 늙어가리라.
빨리 가라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눌어붙던 젊음의 지루한 고독,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마라. 분명히 읽으려고 꽂아둔 책들의 반도 읽지 못하고 우리는 저세상으로 갈 것이다. 나이 들수록 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언젠가 그럴듯하게 보이던 사람이 남용된 권력의 한가운데 서 있기도 하고 영 비호감으로 느껴지던 사람이 소리높여 옳은 말을 하기도 하는 세상, 나는 이제 내가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할 자신이 없어진다. 이참에 세상의 모든 단어를 다 바꾸면 어떨까? 민주는 찐빵, 보수는 호떡, 진보는 붕어빵 혹은 공갈빵으로.
‘체 게바라’가 영원한 건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성실한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지하철을 탄다. 저 속에 아무렇지 않은 듯 끼어 악마가 졸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놀이터에 앉아 있다가 올려다보이는 옥탑방 안의 가족이 행복해 보여 온 가족을 몰살했다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보다는 한참 수위가 낮더라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우리는 모르며 살아간다. 어쩌면 바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며 무심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기억들이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문득 떠오를 때가 많아진다. 그 시시한 순간들이 모여 일생이 되리니.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작은 전파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에 반해 우리 친구 셋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매일 그곳에 들렸다. 그 친구들이 누구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강아지가 그 시절 많이들 기르던 하얀 스피츠였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1년쯤 지나 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우리는 발길을 끊었다. 어쩌면 새 학년이 되어 그 친구들과 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개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일부러 그 가게가 안 보이는 길목으로 멀리 돌아서 다녔다. 언젠가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전파상 아저씨가 무척 섭섭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너희들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통 오질 않니? 들어가서 빵이라도 먹고 가렴.” 나는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끄러운 나의 고독 속으로 문득 이어폰을 통해 이런 노래가 흘러나온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갑자기 그 흔한 노랫말이 천둥처럼 들린다. 천둥이 내게 묻는다. “정말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인가?”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