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 살이] 보드 게임서 배운 인생의 점수

2025-02-03

며칠 전, 오리건을 비롯한 미국 서북부 지역에서 보드게임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인터뷰 내용이 궁금해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Because it rains all the time”이라고 한다.

그렇다. 오리건과 워싱턴주에서는 11월부터 3월까지 해를 보기가 어렵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를 제외하고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편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밖에서 놀기보다는 집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는데, 보드게임 역시 기나긴 우기를 버티는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부터 보드게임을 자주 즐기곤 했다. 짧은 게임은 1시간도 안 되는 경우가 있지만, 긴 게임은 12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장한 게임을 할 때는 새벽부터 모여 샌드위치와 커피로 시작해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게임을 마무리하고 식사를 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골프보다 더 지독한 취미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긴 게임을 하다 보면 그 시간 동안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한편으로는 게임 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나의 삶을 어느 정도 투영해볼 수도 있다.

인생이 5라운드라면, 내 나이 42세, 지금 3라운드 초입 어딘 가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운이 좋아 좋은 부모를 만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필요할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동료와 선배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왔다. 물론 중간 중간 고난이 있었지만, 누적된 손익계산서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결과물이 손실은 아닌 것 같다.

게임의 중반부가 되면 각자가 추구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 자원이 매우 적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플레이어가 있는가 하면, 그때그때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원이나 점수를 쌓아가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점은 게임마다 승리 조건이 무엇인지(자원이냐, 돈이냐, 점수냐)를 명확히 파악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자원이나 돈을 모아도 라운드 끝에서 점수를 내지 못해 게임을 접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면 이런 개똥철학이 나오는 걸까. 우리 인생에서 점수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모으고 누적된 손익계산서를 이익으로 만들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연 내 인생의 승리 조건일까.

자원과 돈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조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행복을 보장하거나 보편적인 선 혹은 가치를 창출하는 충분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득 사람들이 왜 선교여행에 가서 건물을 짓고 자신의 돈과 시간을 쓰는지, 왜 남들보다 못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지 궁금해졌다.

비록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잃더라도 이를 통해 공동체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치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 야밤에 숭고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내가 가지지 못한 주식이나 코인의 가치가 떨어지면 속으로 기뻐하고 그 음험한 마음을 남에게 티도 안 낸 채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길 위에서 마주치는 노숙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선단체나 교회에 헌금도 구두쇠처럼 최소한도로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했던가. 개인부터 글러먹었다. 이제 겨우내 이뤄놓은 자수성가를 잠시 내려놓고,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나라는 인간이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든다.

문득 한 술 더 떠 나를 비웃는다. 나는 왜 아무것도 없던 시절엔 기회의 평등을 갈망하다가, 내가 가진 것이 늘어나니 이토록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안달이 났을까.

이유건 /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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