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독일은 2019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헬스케어 애플리케이션을 의사가 처방할 수 있는 제도, 디가(DiGA)를 도입했다. 환자는 앱을 다운로드받고, 건강보험에서 비용을 전액 부담한다. ‘앱이 약처럼 처방되는’ 의료혁신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이 제도는 기대만큼 확산 속도가 빠르지 않다. 혁신의 속도보다 느린 행정 절차, 의료 현장의 낮은 인식, 그리고 스타트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그 이유다.
#‘앱도 약처럼’
디가는 연방보건부 산하 독일연방의약품의료기기연구원(BfArM)이 관리하며, 의료기기 인증(CE)을 거친 디지털 헬스 앱이 임상적 효과와 데이터 보안성을 입증하면 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제도다. 독일은 2019년 12월 ‘디지털헬스케어법’(Digitale-Versorgung-Gesetz, DVG)을 통해 디가를 제도권에 공식 도입했다. 핵심은 간명하다. 공공건강보험(GKV) 체계를 통해 처방된 앱의 의료 수가를 인정받아 환급이 가능해졌고, 의사가 앱을 처방하면 환자는 활성화 코드를 통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앱을 만드는 기업 입장에서는 공공건강보험을 통한 안정적인 매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제도의 절차와 기준은 2020년 4월 제정된 ‘디지털건강앱조례(DiGAV)’에서 구체화됐다. DiGAV는 ‘긍정적인 치료효과’ 입증 요건, 급여 인정 절차, 등록 요구사항, 품질 평가 항목을 명시해 어떤 앱이 어떤 방식으로 보험급여 대상이 되는지를 규정한다.

디가에 등재되는 모든 절차는 독일 연방의약품의료기기연구원(BfArM)이 관장한다. BfArM은 디가 디렉토리(DiGA Directory) 등재를 위한 신청·심사 절차와 요구사항을 확인하며, 기업은 여기서 예비 등재 또는 정식 등재를 통해 보험 적용 시장으로 진입한다.
현재 약 60개의 앱이 디가에 공식 등록돼 있다. 정신건강, 통증관리, 재활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되지만, 새로운 승인 건수는 점차 감소세다. 임상시험 설계, 데이터 보호 인증, 심사 대응 등에서 수백만 유로의 비용과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시장은 있지만 의료현장은 아직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는 최근 ‘디지털 헬스 애플리케이션 판매 파트너십의 이면’이라는 기사에서 이 제도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뤘다. 디지털 헬스 케어 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과 제약회사의 협업 사례를 소개했는데, 헬로베터(HelloBetter)–라티오파름(Ratiopharm), 크라누스 헬스(KranusHealth)–폴보스캄프(Pohl-Boskamp),셀파이피(Selfapy)–화이자(Pfizer)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제약사와의 판매 제휴를 통해 의사에게 앱을 알리고 처방을 늘리려 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뮌헨의 정형외과 전문의 도미니크 푀링거는 “병원에서도, 개인 진료소에서도 디가 영업사원을 본 적이 없다. 의사 대부분이 디가 처방 절차 자체를 모른다”고 토로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컨설팅 기업 디지털 옥시전(Digital Oxygen)의 자문가 토르스텐 크리스탄은 “초기에는 스타트업들이 의사에게 직접 접근하는 전략을 택했지만 그 방식은 잘 작동하지 않았다. 제약사나 보험사와의 협업 등을 통해 훨씬 비용 효율적인 접근법으로 바뀌었다”고 시장 상황을 설명한다. 독일 헬스케어 컨설턴트 클라우디아 슈미트는 “디가 스타트업으로서 자체 영업을 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제약회사나 메드테크 기업과의 파트너십이 없으면 너무 험난한 길”이라며 스타트업에게 제약회사 및 대기업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한-독 혁신 기술의 시너지 ‘코그테라’의 도전
뮌헨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코그테라는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실질적인 해법을 찾아가고 있다.
코그테라(Cogthera)는 한국의 인지과학 기반 헬스테크 기업 이모코그(Emocog)의 독일 현지 자회사로, 2021년 뮌헨에 설립되었다. 이모코그는 2017년 서울대학교 인지·신경심리학 연구진이 창업한 기업으로, 치매 및 경도인지장애(MCI) 환자를 위한 인지훈련 및 디지털 치료 솔루션을 개발해왔다. 한국에서 임상적 효용을 검증한 뒤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 독일 법인 코그테라를 만들어 디가 인증을 추진 중이다.
코그테라는 독일 현지 의료규제 체계에 맞춰 앱의 UX와 데이터 보안 체계를 재설계하고, 현지 병원·의사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임상 및 상용화를 진행하고 있다. 이모코그가 기술·임상 근거를 제공하는 모회사, 코그테라가 독일 및 유럽 내 인증·시장 진입을 담당하는 전략 거점이다.

코그테라 공동창업자 하네스 풍크(Hannes Funk)는 인터뷰에서 “디가 인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인증 자체로는 돈이 벌리지 않는다. 의사가 처방하고, 환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가 제시한 수치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디가 등재에 드는 비용은) 임상시험과 데이터보안 인증 등을 포함해 최소 100만~200만 유로가 필요하다. 예비 임상만 해도 그 절반 가까운 비용이 든다.” 그래서 디가 인증 이후의 구체적인 판매 계획이 필요하다.
코그테라는 디가 시장을 ‘처방하는 의사 중심이지만 결국 환자·보호자 인식이 동시에 중요한 구조’로 정의한다. 따라서 판매 전략은 의사, 환자, 보호자의 세 축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실제 처방권자는 의사이기 때문에 마케팅의 70~80%는 의사에게 집중한다. 코그테라의 세일즈 파이프라인은 전통적인 제약사 방식을 닮았다. 기존에 관계가 없는 잠재고객에게 콜드콜(Cold call)을 걸어 접점을 만들고, 의학 학회와 보수교육(CME) 프로그램을 통해 관계를 쌓는다. 의사 대상 전문지와 일반 경제매체 등에 회사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PR 전략도 병행한다.

코그테라는 특히 ‘젊고 혁신 수용성이 높은 여성 의사’를 1차 타깃으로 설정했다. 제한된 예산 안에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의료현장에서 변화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는 그룹부터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모회사에서 이미 개발한 앱이 있었지만 앱 디자인도 완전히 뜯어고쳤다. 풍크는 “한국 사용자들은 밝고 따뜻한 색을 선호하지만, 독일 고령층은 그런 색을 ‘유치하다’고 느낀다. 같은 앱이라도 독일 버전은 훨씬 절제되고 차분한 색감을 사용한다”며 앱의 현지화를 강조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니라 신뢰와 처방으로 이어지는 경험 설계의 문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앱을 권유할 때 ‘이 앱이 당신에게 맞을 것 같다’는 신뢰가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증부터 판매까지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지만 코그테라는 낙관적이다. 풍크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디지털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행착오의 시기지만, 이 시장은 분명 성장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한국을 출발점으로 독일의 새로운 제도에 도전하는 코그테라의 디가 등재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한-독 헬스케어 협력, 새로운 무대 위로
10월 23일(현지시각) 프랑크푸르트 인근에서는 ‘한-독 혁신 바이오 헬스케어 파트너링 데이 2025’ 행사가 열린다. 이러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한·독 양국이 디지털 헬스 혁신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무대다.
이번 행사는 한국 중소벤처기업부가 주최하고, 독일의 EIT 헬스(EIT Health), 5-HT 디지털 허브(5-HT Chemistry & Health) 등이 함께 참여한다. 패널 토크 ‘독일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 진입’에서는 대표적인 한국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웰트(WELT therapeutics), 루닛(Lunit Europe), EIT 헬스 관계자들이 독일 시장 진입 전략과 실제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다.
독일의 디가는 ‘완성된 모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진화 중인 제도다. 하지만 그 실험은 전 세계 보건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미리 보여준다. 의료비 절감과 환자 접근성 향상이라는 목표, 그리고 기술혁신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결국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제 과제는 ‘앱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사·환자·보험자·규제기관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에게 독일은 여전히 까다로운 시장이지만, 동시에 가장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시험장이기도 하다. 임상과 데이터, 그리고 현지 의료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된다면, 코그테라처럼 그 문을 여는 한국 기업들이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도가 유럽 디지털 헬스 시장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갈 것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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