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운동복 입고 명품 매장에…부자의 서민 취향은 자신감의 표현

2024-09-18

최근 미국에서는 에코백 열풍이 불었다. 뉴욕포스트는 올여름 뉴욕 젊은 층 사이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이 두꺼운 캔버스 천으로 만든 토트백(tote bag)이란 기사를 실었다. 아웃도어 패션 브랜드 엘엘빈(L. L. Bean)은 이니셜이나 짧은 단어를 새겨 넣을 수 있는 토트백으로 큰 인기를 끌어 매출이 30% 급상승했다. 경쟁사 랜즈엔드(Lands’ End)는 브랜드에 상관없이 쓰던 토트백 두 개를 가져오면 새 백을 1달러에 교환해주는 트레이드인 프로그램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지난 4월에는 식료품 유통업체 트레이더조(Trader Joe’s)의 에코백을 구하기 위해 오픈런을 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2.99달러 천 가방의 리셀 가격은 500달러로 치솟았다.

정장 모임에 홀로 빨간 운동화

지위 과시 ‘레드 스니커즈 효과’

에코백·청바지 대중 트렌드로

부자들의 ‘일상 속 서민 가방’, 에코백

에코백은 2007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안냐 힌드마치가 제작한 “나는 비닐봉지가 아닙니다(I’m not a plastic bag)”가 쓰인 천 가방을 계기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튼튼하고 실용적인 천 가방은 미국에서는 캔버스 토트백으로 불리지만 국내에서는 친환경성이 부각되어 에코백으로 통용된다. 그런데 최근 에코백 열풍은 친환경성보다는 부유층의 애용품으로 알려지면서 확산했다. 캔버스 토트백은 2년 전 최고급 휴양지 마서즈 빈야드(Martha’s Vineyard)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귀네스 팰트로, 리즈 위더스푼이 토트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부유층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위치한 서민적인 가방이 빛을 발한 것이다.

고가 브랜드, 고급스러운 스타일에 저렴한 제품, 서민적인 취향을 접목한 부유층의 ‘믹스앤매치(mix and match)’ 소비는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명품을 사랑하는 여배우로 알려진 사라 제시카 파커는 고가 의류와 매치할 중고 의류, 저렴한 액세서리를 찾아 이탈리아 벼룩시장을 뒤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크라꼬(Cracco)는 슈퍼에서 파는 감자 칩에 최고급 재료를 더한 레시피를 소개해 화제를 낳았다. 한국에서도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유명인이 사용하는 저가 화장품, 와인, 패션 아이템이 입소문을 타며 품절 사태를 빚곤 한다.

일반적으로 유행 확산은 상류층에서 만들어진 취향이 중류, 하류층의 순서로 퍼지는 트리클링 다운(trickling down)의 모습을 보인다. 상류층이 아무나 접하기 어려운 희소한 제품을 소비하며 계층을 구분하면 이를 추종하는 중산층과 또 이를 쫓는 서민층이 뒤따른다. 하위 계층이 모방하면 상위층은 더 비싸고 희소한 상품을 선택하며 우월함을 유지한다.

명품업계도 서민 취향 더한 제품 출시

하지만 트리클링 다운으로 모든 현상이 해석되진 않는다. 부유층이 사용하는 에코백, 저가 화장품 열풍은 서민적인 제품이나 문화가 상류층의 생활에 혼재되어 대중 시장으로 확산하는 ‘트리클링 라운드(trickling round)’로 설명된다. 청바지의 역사도 트리클링 라운드가 뒷받침한다. 원래 광부나 공장 노동자들이 입던 청바지를 상류층 여성이 입은 모습이 보그지에 실리면서 새로운 패션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트러커 캡(trucker cap)도 트럭 운전사들이 쓰던 챙 넓은 모자를 저스틴 팀브레이크 같은 스타가 애용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명품업체도 종종 저가품에서 영감을 얻거나 서민적인 취향을 더한 제품을 선보이며 반향을 일으킨다. 1달러짜리 이케아 쇼핑백을 본떠 만든 2000달러 발렌시아가 백이 대표적이다. 모스키노는 청소 세제 용기에 담은 고급 향수 라인을 출시해 인기를 끌고 있다. 고가 운동화 브랜드 골든구스는 서민 패션을 적용했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쓰며 때 묻고 닳은 신발을 굵은 테이프로 붙여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고급 백화점 노드스트롬에서 530달러에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지만, 가난을 소재로 삼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컬럼비아대학의 실비아 벨레자(Silvia Bellezza) 교수는 최근 두드러진 트리클링 라운드의 배경을 소비의 ‘신호(signal) 효과’로 설명한다. 상류층이 사용하는 희소한 고가품은 계층을 구분하는 신호 수단이다. 하지만 중산층의 구매력이 높아지고 고급 제품의 공급이 확대되면서 명품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점점 커졌다. 고가 명품의 계층 신호 효과가 축소되자 부유층은 자신의 위신이나 권력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신호 방식을 찾았다. 전통적인 고급문화에 저렴하고 서민적인 문화를 더하는 실험을 벌였고, 이는 대중 시장의 트렌드로 발전하게 되었다.

젊은 층도 소비시장 주도

부유층이 일상 속에 서민적 취향을 혼합하고 드러내는 것은 계층과 지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과감한 시도에 거리낌 없는 상류층과 달리, 상대적으로 포지션이 불안정한 중산층은 자신의 지위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유명 브랜드나 고가품을 선호한다. 하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제품을 사용하면 자신의 지위가 손실되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가 명품 매장을 방문할 때 대부분은 고급스러운 옷으로 치장하지만, 부유층은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도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벨레자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모두가 정장을 차려입는 공식 모임에 누군가 신고 온 빨간 운동화가 그 사람의 확고한 지위를 보여준다는 뜻에서 ‘레드 스니커즈(red sneakers) 효과’라 명명했다.

부유층과 함께 소비시장의 피라미드 정상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또 다른 집단은 젊은 층이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패션이나 용어를 기성세대가 학습하면 젊은이들은 금세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거리를 유지한다. 최신 패션과 수십 년 전 유행을 뒤섞는 과감한 소비를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 개인화 시대에 오히려 고립감을 채우기 위한 소속 욕구가 커지고, 이는 소비를 통한 정체성 표현과 집단 구분으로 이어진다. 자아의 연장으로서 제품과 브랜드의 역할은 한국처럼 집단에 대한 애착이 높은 사회에서 더 두드러질 수 있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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