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에 HOT를 좋아했던 한 덕후는, 가질 수 있는 게 문구점에서 파는 사진 밖에 없었다. 내 용돈을 모두 헌납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HOT 굿즈를 만들어 파는 기획사는 고작해야 몇 가지 포즈만 바꾼 사진을 좌판에 깔았다.
그때의 나는 ‘커미션’이라는 말을 몰랐다. 보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을 그려달라 능력자에게 부탁하면 될 것을. 덕후들의 세상에선 ‘주문 제작 창작물을 의뢰하는 행위’를 ‘커미션’이라고 부른다. 생각보다 많은 소비자가, 커미션을 통해 창작자와 만나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제는 기획사가 절대로 찍어내지 않을 예전 아이돌, 내 최애의 굿즈 제작 의뢰도 어느 창작자는 들어줄 지 모른다. ‘공식’의 오버그라운드 시장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롱테일의 시장이 여기, ‘비공식’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니까.
국내외로 커미션을 중개하는 플랫폼도 생겨났다. 쿠키플레이스가 운영하는 ‘크레페’는 ‘덕질의 맞춤 좌판’이다. 우리가 당근에서 중고 제품을 거래하듯, 이들은 크레페에서 덕질 굿즈를 의뢰하고 만들어 판다. 해봐야 이 시장이 고작 얼마나 하겠어 싶었는데 쿠키플레이스 측에서 “10대 여성 마흔명 중에 한 명, 20대 여성 스물다섯명 중에 한 명이 매달 한 번은 크레페에 접속한다”고 해서 놀랐다.
커미션이라는 게 어떤 문화길래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플랫폼을 찾는 걸까. 남선우, 장동현 쿠키플레이스 공동 대표(순서대로 사진 왼쪽부터)를 만나러 홍대입구역의 어느 골목을 걸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피규어 전시 카페라든가, 애니메이션 굿즈 판매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장동현 대표가 “여기 오는 길에 재미있는 공간이 많은데, 보았냐” 물었다. 덕질 시장이 생각보다 크다는 말이었다.
이 ‘덕질을 위한 골목’의 가운데에 크레페 사무실이 있다. 입구부터 가득 붙어 있는 그림이 시선을 빼았았다. 장난스런 2D 캐릭터부터, 게임 원화가가 그린 듯한 아트 작품까지, 내처 벽만 쳐다보고 있었도 재밌겠단 생각을 했다.

크레페, ‘어떤’ 일을 ‘왜’ 하는 회사인가
일단, 여기는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가? 크레페나 커미션 같은 단어들이 내게는 낯설다
남선우 쿠키플레이스 공동 대표(이하 남선우): 크레페는 주문 제작 창작물을 거래하는 플랫폼이다. 그리고, 이 주문 제작 창작물을 의뢰하는 행위를 보통 ‘커미션’이라고 부른다. 플랫폼에서 신청자와 창작자 둘이, 1 대 1로 맞춤형 거래를 한다. 그 사이에 거래를 좀 더 편하게 진행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 플랫폼의 목적이 있다.
커미션 시장에서 플랫폼은 어떤 일을 하나
남선우: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직거래가 많이 진행됐다. 선입금을 한 다음 작업물을 받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이런 일을 막으려고, 크레페 안에서 결제가 일어나게 한다. 신청자가 크레페에서 결제를 하면, 주문한 창작물을 신청자가 받았을 때 대금을 창작자에 지급하는 에스크로의 역할을 크레페가 하고 있다.
처음 듣는 얘기들이다. 이 시장의 규모는 어떠한가?
장동현 쿠키플레이스 공동 대표(이하 장동현):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10대 여성 40명 중 1명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크레페에 접속한다. 20대 여성은 25명 중 한 명이 한 달에 한 번 접속하고. 회원가입을 할 때 본인 인증이 된 이들의 접속 데이터를 근거로, 보수적으로 추정해 계산한 거다.
문화, 콘텐츠 그 자체는 통상 스타트업이 말하는 성장률의 개념만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콘텐츠를 사는 것도 보는 것도 모두 소비인데, 사다가 보게 되기도 하고 보다가 사게 되기도 한다.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가 너무 다양해서, 시장 추산을 하는 것이 쉽진 않다. 그러나, 문화는 롱테일이라, 커미션 시장도 계속해 커지고 있다.
크레페 회원 규모는 어떻게 되나
장동현: 30만 정도다. 그런데 구매 리텐션 등을 고려해봤을 이중 활성 유저가 40% 정도 된다. 굉장히 높은 편이다.
원래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았나
남선우: 기본적으로 내가 서브컬처에 몸을 담고 있는, 소위 말해 ‘오타쿠’다. 나 스스로 오타쿠이므로, 문화를 잘 알고 있고 이런 문화에서 일어나는 서비스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직이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어떠한가?
남선우: 일단 확실히 느끼는 게, 덕업일치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순간 ‘덕’을 많이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소비는 많이 하고 있다. 시간을 좀 덜 들일 수 있지 않나. 또, 덕업일치를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자기가 해당 도메인에 대해 아는 게 많다. 그런 것을 토대로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해 나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어떤 세계관에 푹 빠져들게 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덕후들의 문화, 서브컬처는 정말 일부에서만 관심 있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시장 자체가 한정되어 있다고
남선우: 우리는 크게 1차와 2차로 구분한다. (창작자)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1차, 그리고 다른 매체에서 파생된 것- 예를 들어 팬 창작물 같은-은 2차로. 그리고 이 사이에, ‘드림’이라는 영역이 있다. 내 캐릭터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엮어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팬 창작의 영역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일반 창작의 영역도 들어간다. 생각보다 범위가 넓다
장동현: 커미션이 포함된 문화의 영역은 사실 무한하다. 사람이 어떤 작품이나 세계관을 좋아하게 되는 데는 생각보다 이유가 없다. 내가 덕통사고를 일으킨 이 작품이 세간에서 핫한 작품이 아니거나, 심지어는 공식적인 창작자가 세상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커미션 밖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세계관과 관련한 어떤 문화적 향유나 창작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남지 않아 버리게 된 거다.
그래서, 커미션은 ‘콘텐츠의 가장 롱테일을 담당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서브컬처보다는, 다루는 콘텐츠의 범위 역시 훨씬 더 넓고.
지금 커미션을 하는 이용자들이 더 많아질수록, 덜 유명한 콘텐츠도 계속해 자체적인 세계관을 이어갈 수 있겠다
장동현: 덕질을 얼마나 깊이 있게 잘 할 수 있느냐에는 플랫폼이 상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덕질을 다루는 서비스가 수명이 짧아 금방 사라지거나, 혹은 이합집산처럼 단발성 프로젝트로 끝나버리는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덕질을 오래 고민하고 탐구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서비스를 한다면 좀 다르지 않겠나.
그런 콘텐츠들이 수명을 이어가려면, 그런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가 깔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선우: 소위 ‘플레이그라운드’가 있어야 하는데 자꾸 없어진다. 내가 이걸 갖고 놀고 싶은데, 놀 데가 없다. 요즘 보면 OTT가 많아지는데, 이제는 하나의 (유행하는) 단일 콘텐츠로 모두 모이기 보다는, 각자가 다 다양한 콘텐츠를 좋아한다. 그런데 콘텐츠의 공식 공급자가 이걸 직접적으로 (여러 놀거리를) 제공해주는게 많지 않으면, 결국 내가 좀 더 보고 싶은 걸 찾기 위해 크레페와 같은 곳을 찾게 될 수 있는 거다.
장동현: 사람들이 ‘메이저’ 콘텐츠는 공급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슬램덩크를 봐봐라. 유명하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이 소비하지만, 그 슬램덩크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메이저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 안경선배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장동현: 나는 그게 콘텐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을 어떻게 계속 잘 지켜 나갈지를 고민하고 있고.
AI와 창작, 그리고 K컬처
그런데, 하나 더 물어보자.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굿즈를 자기들끼리 사고파는 걸, IP를 가진 회사에서 싫어하진 않나?
장동현: ‘공식’ 콘텐츠가 제공할 수 있는 놀거리의 양은 한계가 있다. 팬덤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여기에서 유통될 콘텐츠를 만들어주는 사람들은 결국 팬덤이다. 이런 커미션을 통해 팬덤이 커지고, 세계관이 퍼지는게 자신들의 IP 확장에도 도움이 된다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오히려 가이드라인을 줄고 페스티벌을 여는 곳도 있다. 심지어, 비공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공식 기획사에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고.
AI가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 창작자의 입지가 흔들리지는 않겠나?
남선우: 개인 창작이 쉬워진 것은 맞다. 태블릿과 같은 도구도 훨씬 보편화됐고. 예전에 비해 혼자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팔기 굉장히 쉬워졌다.
장동현: 그렇지만, 소비자가 AI가 만든 창작물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도 분명히 있다. 콘텐츠를 왜 소비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특히, ‘여성향’이라고 불리는 콘텐츠의 경우에는 ‘관계성’도 중요하다. 콘텐츠의 대상물과 나의 관계성 뿐만 아니라, 창작자와 나의 관계성, 심지어 창작자와 도구의 관계성도 매우 중요하다. 저 크리에이터가 해석한 나의 굿즈를 소비하는 경우에는 AI가 끼어들 틈이 없다. “나는 네가 만든 작품을 보고 싶은 것이지, AI로 만들어주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하기도 해서다.
남선우: 커미션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알면 이해가 더 쉽다. 주문자가 창작자에 부탁을 할 때, “이 창작자가 나의 부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생각이 창작물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걸 ‘캐릭터 해석’이라고 한다. 창작자가 캐릭터를 직접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생성형AI로부터는 받아보기 힘든 영역이다. 창작자가 주문자의 욕망을 해석하고 작품에 담아야 해서다.
글로벌로도 커미션과 같은 일이 활발히 일어나나? 한국의 창작자가 글로벌로도 경쟁력이 있을까?
장동현: 그렇다. 재미난 것은 크레페가 한국어로 운영된다. 영어 페이지도 제공을 안 하고, 번역도 안 하고 있는데 글로벌 유저들이 들어오고 있다. 결제자 기준으로 7%를 돌파했다. 미국 그림체 말고, 다른 (아기자기한 그림을) 걸 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문화 공동체의 본질은 “싫어하는 같은 사람들”이다.
가장 고민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장동현: 글로벌 소구력은 이미 검증됐다. 더 많은 글로벌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지속 성장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려 한다. 우리가 지속가능해야 덕질을 하는 이들이 커미션을 계속해 이어나갈 수 있다. 이들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디아스포라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한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