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철 "국가 운영 중심은 국회, 다음 지도자는 입법의 달인이어야" [월간중앙]

2025-03-29

원로의 고언| 정대철 헌정회장의 정국 전망

“정의로운 사람이던 기억 속 윤석열, 이번 행동 정의롭지 않아”

“1956년 창당 이후 처음…22대 총선 후 민주당 비주류 사라져”

“개헌 없이 정치 선진화 어려워…시간 부족? 60일이면 충분해”

3월 5일 오후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 올랐다. 그는 “12월 3일의 교훈을 생각해보라. 잘나가던 대통령도 삐끗해, 느닷없이 제왕적 대통령이돼 계엄을 선포했다”며 “앞으로 대통령을 뽑아놓으면 또 이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先) 개헌, 후(後) 대선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광장에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 김부겸 전 국무총리 등 여야 원로 정치인들이 참석해 정 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들을 한자리로 모은 유인은 ‘개헌’이다. 여야의 극한 대치와 12·3비상계엄 사태, 이후 벌어지고 있는 국민 분열 양상은 모두 ‘87년 헌법’ 체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대한민국헌정회관에서 정 회장을 만나 혼탁한 정국을 풀어낼 해법을 물었다.

검사 시절 尹 “서울대 법대 18년 후배입니다”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굉장히 잘못했죠. 헌법 77조의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요건에도 맞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이던 1990년대에 갑자기 서울대 법대 18년 후배라면서 먼저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윤석열은 검사 신분이었죠.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저녁도 같이 먹고 했습니다.”

과거와 지금의 윤석열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나는 윤 대통령을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판단을 하게 됐는지…. 물론 더불어민주당이 29번이나 무리하게 탄핵 시도를 한 것에 대해서 ‘이건 아니다’라고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계엄을 선포할 만한 요건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정의로웠던 사람이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하게 돼 참 안타깝습니다.”

1944년 서울 중구 출생인 정 회장은 경기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법학과 석사, 미주리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어린 시절 부친(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정일형)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적 스승으로 모셨으며, 30대부터 민주당계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5선(제9·10·13·14·16대) 국회의원 출신으로, 화합과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소신은 굽히지 않는 정치를 펼쳤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앞에서 유신의 부당함을 지적한 적 있습니다.

“50여 년 전입니다. 이종찬·최경록 장군과 청와대에서 소주 한 잔 먹게 됐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느닷없이 묻더군요. 그러자 이종찬 장군이 ‘각하’ 그러면서 말렸는데도 박 대통령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석한 차지철 경호실장이 제 발을 꽉 누르더라고요. ‘말조심해라’는 경고였겠죠.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저와 차지철 사이에 앉더니 차지철에게 경고하면서 제게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저는 ‘이젠 어쩔 수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해 ‘경제적으로는 나라를 위해서 잘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서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난리가 났죠.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야당 의원이 할 말 한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군요.”

과거 정치인들이 보여줬던 담대함과 포용력은 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공천 때문에 자기 생각을 말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후배 의원들을 보면 여야 가리지 않고 용기 있는 의원들이 좀체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민주당에서는 22대 총선 이후에 비주류가 거의 없어진 것 같아요. 이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광장 민주주의의 득세다. 탄핵 찬반을 두고 여야 강성 지지자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극렬히 대립하는 양상이다. 집회마다 참석자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이 때문일까. 여야 정치인들도 광장으로 나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형국이다.

우리 정치가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광장 민주주의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가는 모양새입니다.

“국민이 직접 자신들의 의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국민저항권이 발동돼야 하는 위중한 상황이나, 집회를 간헐적으로 열어 의견을 표출하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광장 집회가 상시적인 정치 행태로 발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민란 없도록 여야 함께 힘써야”

어떤 점이 특히 우려되는지 궁금합니다.

“팬덤 정치와 맞물려서 극렬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주장이 다수의 당원과 대의원들의 주장을 덮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극렬주의자들의 네거티브 주장에 힘이 실리면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의회 정치의 기능을 약화, 심하게는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정치의 중심이 광장으로 넘어가서 의회정치, 간접민주주의가 무시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집회가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힘의 대결로 서로 맞부딪히면서 소규모 민란과 같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정부와 여야 정치인이 다 함께 힘써야 합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영수회담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8회)이다. 그 뒤로 이명박 전 대통령(3회), 노태우·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2회), 문재인 전 대통령(1회), 박근혜 전 대통령(0회)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여대야소였으며, 박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나라가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차기 지도자가 가져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요?

“여러 정치학자와 리더십 평가단체들이 낸 책을 보면 대체로 △비전 △인사 △위기대처 △정책 실행력 △도덕성 등이 대통령의 자질로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입법의 달인이 돼야 한다’는 말을 더하고 싶습니다.”

행정의 달인이 아니라 입법의 달인이요?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 국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와 대화·타협·협상하는 입법의 달인으로서 명령과 통제의 통치자보다는 다차원적인 정치적 조종자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만남과 경청입니다.”

윤 대통령 취임 후 야당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국정운영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참 아쉽죠. 윤 대통령은 임기 3년 동안 야당 대표를 딱 한 번 만났습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 대표를 석 달에 한 번 만나도 부족한데 말이죠. 대통령은 정치 친화적이 돼야 하는데 윤 대통령은 그 점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윤 대통령 취임 초 ‘정치 초보’라는 평가가 나왔는데, 결과적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국회의원 선거, 아니 도의원 선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검사만 해서 정치인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었던 사람입니다.”

보수는 ‘안갯속’, 진보는 ‘양극화’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조사하고 3월 3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여야 차기 대선 주자 적합도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46.3%를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18.9%,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6.9%, 홍준표 대구시장 6.8%, 오세훈 서울시장 5.1%, 유승민 전 의원 2.1%, 이낙연 전 국무총리 1.7%, 김동연 경기지사 1.4%,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각각 1.3%를 기록했다. 양자 대결에서는 이 대표가 50.0%로 집계돼, 보수진영 1위 김 장관(31.6%)을 따돌렸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진보 진영 대선주자 간 지지율 양극화가 심합니다.

“1956년 민주당 창당 이래 지금처럼 당내 비주류가 사라진 적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김동연, 김부겸, 김경수 등이 이재명과 힘겨루기를 해서 이기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3월 26일 이 대표가 공직선거법 2심 선고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당내에서 이 대표의 사퇴와 불출마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겠지만, 그렇다고 이 대표가 자리를 내놓겠느냐, 전 꿈 쩍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6년까지 민주당 상임고문을 맡으셨습니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향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정당이라면 중도까지 흡수하려고 노력해야 하거든요. 실질적인 효과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도 보수론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반등했고, 대권 주자 양자 대결에서 이재명 대표가 50%를넘어서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국 이 대표가 이슈 주도권을 잡았다는 뜻이 되겠죠.”

52시간 예외, 상속세 감면 등 민주당 대선주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정책도 내놓고 있습니다.

“비명횡사 이후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문제는 이 대표가 지금까지 대동세상, 평등 같은 진보적인 가치를 줄곧 주장해왔다는 점입니다. 이 대표는 지난 2016년 성남시장이던 시절 SNS에 ‘이재명은 중도 코스프레 안 한다’는 글을올린 적 있습니다. 이외에도 비슷한 말을 이 대표는 SNS에 자주 올렸는데, 적당한 이유와 필요성을 설명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줄탄핵, 줄기각’은 명백히 이재명 책임”

민주당의 최대 리스크인 계파 갈등이 수면 위로 올랐다. 이 대표가 지난 5일 진보 성향 유튜브인 〈매불쇼〉에 출연해 과거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 상황에 대해 “당내 일부와 검찰이 짜고 한 짓”이라며 트리거를 당겼고, 비명계가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해 점화됐다.

비명(비이재명)계 검찰 결탁설’ 등 이 대표의 설화가 민주당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참 지난 일을 느닷없이 언급한단 말이죠. 저는 이것이 이 대표의 의도된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저의(底意)가 깔려 있다고 보시나요?

“비명계가 만약 ‘이재명 흔들기’에 나서면 큰일 날 수 있다는 사전 경고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대표는 포용과 통합의 자세를 꼭가져야 합니다. 대선주자 가운데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면 여당도 포용해야 합니다. ‘줄탄핵, 줄기각’은 명백히 이 대표 책임입니다. 야권 192석이면 여당에 양보할 줄도 알아야죠. 그래야 정치가 살아납니다. 지금은 정치가 그야말로 전쟁 상태입니다. 이 대표는 정치를 복원시켜서 상생·협치·통합의 정치를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국민의힘은 ‘야당의 입법 폭거, 예산안 일방 삭감’을 지적하는 반면, 민주당은 ‘다수결로 정당한 권한을 행사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라는 입장입니다.

“정치에서는 힘의 논리를 가급적 내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다수결이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대안까지 마련해서 천천히 진행해야죠. 빠른 다수결은 위험합니다. 결국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을 주게 된 셈이죠.”

지난 5일 서울역 앞에서 ‘헌법개정 범국민결의대회 서명운동 발대식’을 열었습니다. 개헌의 열망은 어느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복수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 정도가 개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야 지도자, 전직 국회의장·국무총리 등이 예외 없이 개헌에 찬성합니다. 사실상 이 대표 한 명의 동의만 남았다고 보면 됩니다.”

“민주주의 한 단계 도약하는 해 됐으면…”

개헌이 불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저는 개헌 없이는 한국 정치의 선진화가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최소한 제왕적 대통령제만이라도 민주적 대통령제로 바꿔야 합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교훈입니다.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제왕적 대통령으로 변해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께서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개헌하기에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요?

“여러 헌법학자는 여야가 합의할 시 권력구조에 대한 ‘원 포인트 개헌’이 60일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한 개헌은 나라가 안정됐을 때 천천히 하면 됩니다. 만약 정 시간이 부족하면 대선과 개헌 국민 투표를 함께 해 ‘이 선거에 의해서 당선된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에 의해서 통치한다’고 부칙에 넣으면 됩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 38년 동안 여덟 분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모두 공약으로 개헌을 약속했지만, 그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선 개헌, 후 대선’을 해야 합니다.”

개헌론이 이 대표를 포위하는 모양새다. 여당과 비명계가 개헌과 관련한 이 대표의 입장 발표를 촉구하고 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이 대표가 봇물 같은 개헌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적절한 시기에 입장을 밝히지 않겠나 판단하고 있다”라고 했다. 개헌 논의의 열쇠를 쥔 이 대표는 개헌론에 거리를 두면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표와 개헌과 관련해 대화해 보셨나요?

“1월 11일 이 대표와 25분 정도 통화했습니다. 제가 개헌의 필요성을 설명하니 이 대표가 ‘선배님 숙고하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2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대표도 개헌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헌정회장으로서 ‘2025 대한민국’에게 덕담 한말씀 하신다면.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한꺼번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하는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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