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라는 도시가 한국인들에게 처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1956년 헝가리 혁명 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공산주의 소련 영향권에 편입된 헝가리는 별로 내키지 않는 공산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소련의 내정 간섭이 극에 달한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반(反)공산주의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소련의 조종을 받는 헝가리 정부가 강경 진압 방침을 밝혔으나, 정규군 장병 일부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채 시민군에 가담했다. 결국 소련군이 개입해 헝가리 전역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그해 11월 11일 부다페스트는 끝내 소련군 수중에 떨어졌고, 수많은 시민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등 피의 숙청이 뒤따랐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에선 ‘북방 외교’ 열풍이 불었다. 동서 냉전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그때까지 소련 눈치를 보며 북한하고만 친하게 지내던 동유럽 국가들이 비로소 한국에 시선을 돌린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자신감을 얻은 노태우정부는 우리 외교망을 동구권까지 확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989년 2월 1일 공산권 국가들 가운데 처음으로 헝가리가 한국과의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부다페스트는 우리 북방 외교가 첫번째 승리를 거둔 곳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두 나라 수교 후 헝가리는 오랫동안 중부 및 동부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한국의 ‘허브’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2019년 5월 29일 양국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부다페스트 시내를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에서 유서깊은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그만 선박 추돌 사고로 침몰한 것이다. 한국인 26명이 목숨을 잃고 1명은 실종됐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2019년은 한국·헝가리 국교 수립 30주년에 해당하는 뜻깊은 해였다. 사고 수습을 위해 다급히 부다페스트로 날아간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30주년 수교를 맞는 양국 관계에 이 어려운 도전을 맞았다”라는 말로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알래스카 정상회담 이후 미·러·우크라이나 3자회의 가능성이 무르익는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까지 포함해 3인의 정상이 회합할 장소로 부다페스트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헝가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이지만 나토의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은 물론 EU의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푸틴과의 긴밀한 관계를 공공연히 과시하는 중이다. 물론 오르반은 트럼프와도 절친한 사이다. 이뤄지기만 한다면 부다페스트라는 도시가 생겨난 이래 가장 많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트럼프·푸틴·젤렌스키 3인이 모여 그냥 사진만 찍는 것으로는 곤란하고, 뭔가 실질적 성과를 도출해야만 부다페스트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길 학수고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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