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 강의를 나간다. 많으면 한 달에 서너 번,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다. 어느 날 불현듯, 내가 강의하기를 즐기는 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된 일이 있다. 질문을 꼭 받는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도 질문 하나를 받았다. 기실,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장르 구분이 잘 안 돼요.”
장르는 도구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설명하기 위해 발명해낸 결과물이다. 물론 나도 장르에 목매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차이에 대해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대학 시절에는 조금이라도 장르를 명확하게 포착하고 싶어 로이 셔커의 <대중음악사전>, 딕 헵디지의 <하위문화>, 사이먼 프리스의 <사운드의 힘>, 한국 음악 평론가들이 공저한 <얼트 문화와 록 음악> 등의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한데 이즈음부터였다. 나는 장르로부터 해방되면서 음악을 더 폭넓게 듣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초기 블루스 레코드, 현란한 스케일과 연주를 뽐내는 모던 재즈, 클래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이탈리아 아트 록 밴드의 앨범을 편견 없이 감상했다. 온몸을 귀로 만들고 싶은 시절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도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조금은 더 음악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긴, 인간은 그 어느 쪽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것마저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눠야만 직성이 풀리는 존재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가 공통으로 강조한 게 있다. “모든 분류는 그 자체로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분류라는 행위 자체에 권력의 시선은 이미 존재한다. 장르 나누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장르에 속박될 이유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편견은 눈 녹듯 사라지고, 환희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