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 부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2024-10-23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보기에 부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애칭 Ike) 중령은 좀 어리바리했다. 특색이나 카리스마도 없었다. 내세울 거라고는 지금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여사처럼 호탕한 웃음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국민은 “I like Ike”라고 환호했다.

그랬던 아이젠하워가 맥아더를 이어 원수(5성 장군)에 오르더니 예편과 함께 엉뚱하게 컬럼비아대학 총장을 거쳐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심사가 뒤틀리던 맥아더는 부관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나라고 대통령이 못될 것 없다 여겨 민주당에 후보 신청을 했다. 로버트 태프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 그런데 태프트가 경선에서 탈락하자 맥아더는 출마도 못 하고 겸연쩍게 정치의 꿈을 접었다.

1952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의 전황을 살피려고 그해 12월 2일 밤에 오산 비행장에 도착했다. 동선이 극비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도착 사실을 뒤에서야 알았다. 3박 4일 동안 한국에 머물며 미군 막사로 쓰던 동숭동 서울대에서 묵었다. 그때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는 외아들로 소령 계급에 직책은 대대장이었는데 유럽 전구에서 조지 패튼 장군의 막료로 촉망받던 장교였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보니 미군사령부는 고민이 컸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포로가 될 경우에 발생할 수 있을 어려움 때문이었다. 후방 근무를 건의하자 존은 “포로가 되면 자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고민 끝에 아이젠하워는 아들을 도쿄사령부로 전출하도록 하고,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의 아들은 전투 현장에 배속하지 않는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존은 그 뒤 장군이 됐고 전사가(戰史家)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군번도 없는 인간들이 더 설쳐서 그런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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