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보는 의사 되겠단 아들…'극성 엄마'는 응원했다

2025-12-16

세대 불문 미래 불안과 정체성 혼란.

삶에 훅 들어온 AI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난 수명 탓에 사회가 정한 낡은 생존 방정식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전인미답의 길 위에서, 우리가 불안을 줄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엔진은 뭘까요. 많은 전문가는 '질문'을 꼽습니다. 질문만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생을 재정의하는 통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질문하는 인생' 시리즈는 다른 이들의 질문을 통해 내 질문을 찾아 나서는 여정입니다. 오늘은 법의학자인 서울의대 유성호 교수입니다.

법의학자 유성호 인터뷰

수강신청 때마다 광클을 부르는 인기 의대 교수이자 저명 법의학자. 지상파 범죄 교양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이자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유명 시사 프로 단골 출연자. 구독자 47만(※10월 말 44만에서 3만이 늘었다)의 잘 나가는 유튜버(유성호의 데멘톡)이자 구독자 300만 넘는 초대형 유튜브 채널 침착맨이 초대할 정도의 유명 게스트. 모두 유성호(53)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를 수식하는 말이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2019)로 일찌감치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를 지난 10월 27일 서울대 의대 연구관에서 만났다. 첫 책 출간 6년만인 올 초 두 번째 책『유언 노트』를 낸 데 이어 불과 6개월 후인 지난 10월『시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를 연달아 냈는데, 이를 핑계 삼아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그는 "둘은 쌍둥이 책"이라며 "하나는 죽음과 관련한 정신적 내용, 다른 하나는 신체적 내용"이라고 했다. 또 이렇게 부연했다. "부검대 위 시신을 해부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내 직업도 결국 환자 보는 의사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의학이더라. " 20여 년 동안 3000구 넘게 죽은 시신에 귀 기울이기만 했던 그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유 교수가 나누고자 한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으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죽음, 그리고 어머니

시골 출신 어머니는 교육열 강한 딱 그 시대 어머니였다. 국민학교 6학년 때인 1980년대 초반 담임 선생님이 "강남 8학군 가라"고 권하자, 빚 져가며 어렵게 마련한 서울대 인근 봉천동 단독주택을 미련 없이 팔고 이사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난 봉천동 중·고교에서 애들한테 맞고 다니다 서울의대에 못 갔을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어머니가 좌지우지하는 집안이었다.

맹모삼천지교 못지않게 이사 다니면서도 어머니는 "공부하라" 소리는 일절 안 하셨다. 대치동조차 학원 없던 시절이라 중학교 땐 무협지·만화 정말 많이 읽고 좋아하는 농구 실컷 했다. 다행히 공부를 곧잘 했고 어머니는 의사를 권하셨다. 삼 남매 맏이인 내겐 의대·법대 두 선택지가 있었는데, 어머니 눈에 공부 안 좋아하는 나는 의대 당첨이었다. 어렵게 사법시험 통과해야 하는 법대와 달리 의사는 의대만 졸업하면 평생 룰루랄라 사는 줄 잘못 알고 내린 결정이었다.

시신 보며 매년 유언장 쓴다

잘살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

법의학도 산 자를 위한 의학

아들에 권할 만큼 좋은 직업

그렇게 의대 보낸 아들이 돈 잘 버는 성형외과 의사가 아니라 시체 보는 법의학자를 한다 했으니 다들 어머니가 반대했을 거라 짐작한다. 아니다. 처음부터 "너 하고 싶은 거 하라"셨다. "이미 너한테 모든 걸 얻었다"면서. 훗날 아버지한테는 "성호가 법의학 하면서 행복해하니 참 잘 됐다"며 진심으로 기뻐하셨단다. 학원비 댔다는 이유로 자식 직업 선택에까지 지분을 주장하며 법의학 근처도 못 가게 하는 적잖은 요즘 의대생 부모와는 달랐다. 사랑만 듬뿍 주셨다.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보다 어머니를 더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가 1년여 전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정말 큰 충격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죽음은 황망하고 불길한 단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기에 애도의 과정을 배워야 한다고 늘 말해왔다. 죽음을 일상으로 마주하고, 10년 넘게 '죽음의 과학적 이해'라는 수업을 하며 죽음을 가르쳐왔는데도 막상 내 일이 되자 비탄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머니는 손꼽히는 명의들한테 진료받았지만 어느 순간 호스피스 병원을 선택하셨다. 투병 전부터 나와 대화하며 죽음을, 아니 삶을 성찰해온 어머니는 거기서 두어 달 "행복하게 살았다"며 돌아가셨다. 어머니 스스로 정한 마지막이고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라 셨기에 후회는 없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대신 온전히 애도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너무 빨리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관계, 그리고 아들

난 책이 제일 재밌다. 그랬기에 더더욱 국내 1호 법의학자 문국진 교수님처럼 대단한 사람만 써야 한다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 강의가 워낙 인기를 끌어서인지 출판사에 떠밀려 첫 책을 냈다. 누가 살까 싶었는데,『나는 시체를 매주 보러 간다』(2019)가 제법 팔렸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죽음' 자체가 매력적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관계를 돌아보게 하니까, 자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게 하니까. 다시 말해 삶을 성찰하게 만드니까. 나도 그랬다.

'유퀴즈' 등에서 내가 자주 말했듯 졸업 직전까지 법의학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윤성 교수님의 본과 4학년 1학점짜리 법의학 수업이 인생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 강남키즈나 의대생은 내 의지 아닌 우연의 산물(어머니 결정)이었지만 법의학만큼은 온전히 내 선택이었다. 정말 좋았다. 큰 부를 누리진 못해도 밥벌이하고, 공동체에 도움 주고, 성장할 수 있는, 내 자식에게 시키고 싶은 훌륭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의대생 아들에게 미국 웨인 스테이트 대학의 3대째 법의학 가문 얘기를 해주며 물었다. "법의학 할래? " 답은 이랬다.

성형외과 원했던 어머니 바람과 달리 법의학자가 된 나처럼 아들 역시 내 희망과 무관하게 돈이든 뭐든 본인이 추구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각자 인생이다. 난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면 그만이다. 이런 말 하면 혹자는 나와 부모님 관계에 빗대 사랑을 주고 존경을 받고 싶은 거냐 묻는다. 아니다. 자식은 물론, 남과의 인간관계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난 모두에게 친절하고 선의를 품겠다 마음먹지만 상대도 똑같이 날 대하길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위험하고 슬픈 일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나도 호의 주고 상처받기 일쑤였다. 10년 넘게 매년 연말 유언장을 쓰면서 서서히 달라졌다. 고교 친구들이 가끔 나더러 "너 그땐 이기적이었어"라고 한다. 지금의 내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얘기 아닌가.

공유하고 싶었다. 죽음 수업에서 "93세에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 묻는 유언 에세이 쓰기를 과제로 내는 이유다. 대다수 학생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지금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 결심을 한다고 했다. 또 바쁜 일상 탓하며 자꾸 미뤄온 관계를 돌아보고 못 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할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내가 그랬듯이.

사랑, 그리고 아내

유언장은 쓰지만, 거창한 인생 계획은 안 세운다. 어려서부터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데, 다행히 일이 다 잘 풀렸다. 서울대 최고 인기라는 내 교양 수업도, 제작사 설득에 못 이겨 시작한 유튜브 채널도 그렇다.

2012년 "의대 교수도 전공 말고 관악 캠퍼스 교양 수업에 기여하라"는 압박에 못 이겨 '죽음의 의학적 이해' 강의 계획서를 냈는데, 당시 승인 권한이 있던 기초교육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연이은 카이스트 학생 자살로 떠들썩할 때라 죽음이라는 단어에 과민반응을 보인 거다. 시키는 거 시늉만 하자던 마음이 오기로 바뀌었다. "유한한 삶을 인식해야 성찰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이름을 살짝 바꾼 '죽음의 과학적 이해'가 탄생했고, 이젠 500명 자리가 광속 마감되는 인기 강좌가 됐다. 기대 없이 지난해 런칭한 유튜브도 구독자가 47만이다.

매사 소극적이고, 계획보단 우연에 이끌려왔지만 돌아보니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전부 내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바로 법의학자라는 직업과 아내와의 결혼이다. 약사 아내는 대학 봉사 연합 서클에서 만났는데, 내 눈에 정말 예뻐 세게 대시했다. 그리고 아내와 안온한 삶을 꾸리기 위해 평생 가정적으로 지내려 노력해왔다. 남들이 온화하다고 평하는 내 성격은 그런 면에서 노력의 산물일지 모른다. 만약 지금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사랑이 그렇게 만든 거다. 가정에서 뿐만이 아니다. 난 무슨 일이든 최악을 상정할 정도로 비관적인데, 다른 시각에서 긍정을 불어넣는 아내의 사랑이 이를 보완해줘 내 많은 성공의 밑거름이 됐을 거라 믿는다. 법의학자로서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법의학자 초기엔 죽음이 두려웠다. 10년 지나니 인생이 허무했다. 20년 넘어 주위를 둘러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사랑은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기왕 사랑 얘기를 한 김에, 사랑의 상징과 은유인 심장 얘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법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심장은 설렘이나 낭만과 거리가 먼, 생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다. 단일 질환으로는 국내 사망 원인인 1위에 해당하는 장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과로하다 급성심근경색으로 내 부검대 위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하려면 유언장 쓰기처럼 삶을 성찰하는 정서적 질문 못지않게 삶의 엔진인 심장 등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삶의 습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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